2008. 1. 14. 23:40

나의 글모음 - 5

「 ‘무신론’ 김경재 신학교수의 신년 대담 분석 」(※ 연결됨.) 이라는 인터넷 신문 ‘바이블 파워’(http://www.biblepower.co.kr)의 기사를 보고 답답함이 일어나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려봅니다.

2008. 1. 13. 주일....
HanSaRang...

&
King James Bible 1611

【 비 평 】

○ 이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약탈하는 이리들, 흉악한 이리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 빛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 거짓 교사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는 자들이 아닌가! 성경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4)

작년에(2007) 자칭 ‘교수, 철학자, 지혜자, 학자, Master’라고 자부하는 한신대(한국신학대학) 출신인 '돌 김용옥'씨가 한국 교회를 상대로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것에 관한 기사글을 읽어 보았지만, 그가 했던 말 중에 인간에게 바른 명철을 주는 말은 한 구절도 없었다. 그가 자기의 두뇌속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을 꺼내어 수많은 말들을 했지만, 들어도 그만 안들어도 그만인 것들뿐이었다. 왜 그럴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김용옥 씨는 중앙일보에『도마 복음』이라는 가짜 성경을 주석하는 글을 쓰고 있는데, 그 가짜 성경을 가지고 66권으로 이루어진 진짜 성경을 대적하는 글을 쓰고 있다.
성경은 B.C. 1650년경부터 A.D. 96년까지 1700여년에 걸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은 40여명의 기록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경의 가장 신비스러운 점은 서로의 책이 동일한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 과연 인간의 ‘지혜’로 이렇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창세기의 기록에서 마귀가 첫번째로 이브에게 했던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인간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파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로 판단해 볼 때에 김용옥 씨가 하는 일들은 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사탄의 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태복음 7:16, 20에서는
16 너희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리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둘 수 있겠느냐?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의 열매들을 보고 그들을 알게 되리라.』말씀한다.
자기가 성경에 대해서 무엇인가 잘 아는 것 인양 성경을 들고 폼을 잡지만, 마태복음의 말씀처럼 그의 말을 듣고서 누가 구원을 얻었는가! 그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종인가, 악령(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탄의 종인가? 어린아이라도 이 정도의 판단은 할 수 있는 것이다!

10 오 모든 간교와 악행으로 가득 찬 너 마귀의 자식아, 너 모든 의의 원수야, 네가 의 의로운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일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11 이제, 보라 의 손이 너에게 있으니 네가 눈이 멀어 한동안 태양을 보지 못하리라.” 하자, 그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치므로 그가 앞을 더듬으며 손으로 자기를 인도해 줄 사람을 찾더라.』(사도행전 13:10, 11)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완고한 혀는 끊어지리라.』(잠언 10:31)
─「너 마귀의 자식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부복하고 바른 진리의 길로 돌아올 때까지 네 입이 닫힐지어다!」

(고린도전서 1:25)는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바른 지식과, 바른 분별력과, 바른 명철과 판단력이 필요한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세상(cosmos)’이라는 곳은 ‘선(善)’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악(惡)’한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한 올바른 답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한 번 주위를 돌아보라. 생명체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인간들의 손에서 나온 것들인데,,, 그러한 것들이 인간들에게 유익만을 가져다 주었는가? 원래의 만들어진 목적에서 벗어나 사용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인류에게 해를 끼치는가!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만든 것들로 인해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볼 때에 얼마나 인간이란 존재가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멍청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표현하지만, 이 말은 한 가지 전제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듭난 존재(두 번째 태어나는 존재)’가 되었을 때에 이 말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이 말은 인간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며, 인간의 마음 속에는 결코 선한 것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최초의 인간인 ‘아담(Adam, 붉은 흙)’의 타락이후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지구상의 어떠한 책에서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책은 성경 외에는 없는 것이다. 현재, 지구 인구는 약 66억 7000만명이라고 하는데,
「 1ː66억 7000만 」이 대결했을 때에 과연 인류는 이길 수 있겠는가? 과연, 인류는 자신의 창조주를 이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땅에서 자칭 ‘현자들(賢者),’ ‘지혜로운 자,’ ‘The Master,’ 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자인지 성경의 말씀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바로 이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의 교육가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훌륭하고 가치있는 존재들로 자라나게 하고 싶다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 우주와 인간에 대한 “진짜 진리”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 32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악으로부터의 자유, 거짓으로부터의 자유, 무의미에서의 자유, 공허함과 허무함에서의 자유,,,, 참다운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평화와 생명과 환희,,,,즉, “구원(be saved)”을 원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은 바람에 날아가는 먼지와 같은 것이다. 인류가 자기의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전수하고 전해주어야 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참된 진리를 아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나의 조상들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인생의 선배들’이라고 하는 자들도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과 주장으로 후손들을 이끌고 있다.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지 모른다. 참으로, 마음이 애통하고 울화가 치밀어 오를 뿐이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주신 “그 책(The BOOK)”을 통해서 올바른 진리와 분별력과 지식과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에게는 올바른 것을 분별하고, 측정할 수 있는 잣대(Canon)가 필요한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세상이라는 곳은 ‘악(Evil)’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가짜 진리” 와 “진짜 진리”를 제시해 볼 텐데, 무엇이 ‘인간(人間)’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는지 비교해 보기 바란다.

◀ 예시글 ① ▶

[ 돌 김용옥 씨의 글. ]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 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 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 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 예시글 ② ▶

[ 홍의봉 선교사의『세상이 무너져도 한국은 무너지지 않는다(1999)』에서 발췌한 글... ]

< 제17장ː영적 전투 >

내적치유를 통해 깨끗해지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역사된다 할지라도 영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영적전쟁은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이며, 전투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벌어진다.
「적을 알고 나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한다」는 격언은 영적전쟁에도 절대적으로 해당되는 만큼 먼저 적의 전략을 알아보자. 적은 세 가지 방법을 통해 공격해 온다.
첫째, 주위의 환경을 통해서 죄를 짓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우리 주의의「보고 듣고 읽는 것」거의 모두가 인간을 죄의 덫으로 빠지게 하는 유혹들이다. 비디오, 영화, 컴퓨터 게임, 포르노, 성인만화, TV 등등 거의 모든 세상의 매개체들이 마귀에게 이용되어 인간이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목적에 사용된다. 퇴폐업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요즘엔 비디오방, 노래방, 전화방, PC 방, 멀티방, 심지어는 이벤트 회사까지 동원된다. 환경을 통해서도 그렇지만 주위의 친지나 친족 또는 직계 가족들을 통해서 유혹과 갈등을 조장하여 죄를 범하도록 시도한다.
둘째, 마귀들이 직접 공격해 온다. 이 경우 마귀들이 직접 생각을 인간의 두뇌(Brain) 속에 집어 넣어 유혹하는 것이다.
마귀들은 영적존재(靈物)이므로 인간의 두뇌 속에 생각을 집어 넣을 수 있다. 영적 세계(靈界)에 들어가면 우리 인간의 혼도 서로 생각과 생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또한 마귀들은 주위의 환경을 꼬이게 하거나 길을 막아 억압함으로써 죄를 범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셋째, 인간의 두뇌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지식과 기억들이 스스로 죄를 유발하게 한다. 죄성과 자아를 몰아내고 내적치유를 거쳐 깨끗해졌으며,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역사되어지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두뇌 속에는 죄의 지식과 기억들이 남아 있다. 그 죄의 지식과 기억들이 어느 순간 죄가 얼마나 쾌락적이고 달콤했는지를 생각나게 하면서 죄를 범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공격해 오는데 웬만큼 무장이 안된 사람은 속수무책일 것이 뻔하다. 사탄에게 종노릇하던 인간들이 죄에 찌들어서, 죄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것이 이처럼 처절하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맞서 효과적으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우선 위의 세 가지 공격이 모두 인간의 두뇌를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때 그 죄의 유혹을 인간의 의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하여 즉각 내쫓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를 통해 드나드는 생각은 인간의 의지로 콘트롤(
Controlː제어) 할 수 없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각은 수시로 두뇌를 드나든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에서 수만 가지의 생각이 사람의 두뇌를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죄의 유혹이 두뇌에 들어왔을 때 이것을 의지로 재빨리 물리치면 죄를 범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죄의 생각을 의지로 받아들여 마음에 품으면 이미 범죄한 것이며, 마음에 품은 죄를 행동으로 옮기면 두 말할 것 없이 범죄한 것이다. 그러니까 죄를 막는 길은 아예 죄의 유혹이 두뇌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사전에 차단하거나, 죄의 유혹이 두뇌 속에 들어왔을 때 의지로 물리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이 두뇌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전 차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생활주변에서「항상 보고 듣고 읽는 것」이 거의 모두 죄의 생각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눈을 감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죄의 지식과 기억들이 느닷없이 두뇌에 떠오를 때라든가, 마귀들이 직접 생각을 집어 넣을 때 이를 사전 차단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거룩하게 변화되는(聖化ː성화) 깊은 단계에 들어가면 두뇌의 정화도 가능하며, 주 예수님의 보혈은 두뇌까지도 정화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고, 마귀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성도의 경우, 두뇌의 생각까지 정화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죄를 막을 수 있는 저지선 즉 마지노선은 인간의 의지이다.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막을 수는 없어도 새들이 머리 위에 둥지를 짓고 알을 까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의 유혹이 두뇌에 침입하였을 때 자유의지로 즉각 쫓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을 까고 결국은 죄가 침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가 죄를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기능이 제대로 작용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이란 죄를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판단력과, 죄를 죄라고 판단했을 때 이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두 가지 기능 중에 한 가지만 작용을 안해도 죄는 인간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와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기능에 대하여 잘 알고 작용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다.
먼저 죄를 죄라고 판단해 주는 기준은『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엇이 하나님 앞에 죄인가를 명확히 깨닫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 평소에 늘 묵상하고 있어야 죄의 생각이 들어왔을 때 재빨리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엔 마귀가 워낙 교묘하게 고차원의 수로 말씀을 살짝 속여 편리한 대로 왜곡하여 공격함으로 말씀을 잘 알지 못하는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공격의 첫 관문에서 이미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도전하고 의심을 불어 넣으며 왜곡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사탄이 처음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범죄하게 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거역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탄은 『성경』(
The BOOKThe WORD of GodThe SCRIPTURE)을 없애 버리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성경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려고 수차례 시도하였고, 중세기 암흑시대에는 아예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사주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발악이 실패하자 근래에는 말씀을 왜곡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 ‘자유주의자’(Liberalism)들이「고대에 쓰여진 성경을 현대에 맞게 재평가해야 한다」면서 멋대로 왜곡한다. 그들의 배후가 무엇인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식의 자기 편리한 대로 어느 말씀은 받아들이고 어느 말씀은 배척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진실이며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임재하여 계신 성령님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성령님이야 말로 성경이 쓰여질 때 저자들의 마음을 감화 감동케 하여 인도하신 오리지날(
Original)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옛 성전터인 통곡의 벽에 가보면 유태인들이 팔뚝을 가죽끈으로 칭칭 감고 이마에는 네모난 작은 박스를 달았으며, 입고 있는 옷에는 수를 놓은 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 연유를 몰라 의아해 했으나 성경을 읽으면서 해답을 얻게 되었다.

『○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들을 너희 마음과 너희 혼에 두고, 너희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아 그것들로 너희 양눈 사이에 표가 되게 하라.』(신명기 11:18)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그들 대대에 걸쳐 그들의 옷단에 술을 만들고 그 옷단의 술에는 청색 끈을 붙이도록 명하라. 39 이 술에 단 끈은 너희로 그것을 보고 의 모든 계명들을 기억하여 그것들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너희로 음란하게 숭배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눈을 따라 추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며 40 너희로 기억하고 나의 모든 계명들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께 거룩해지게 하려 함이니라. 41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민수기 15:38, 39)

뿐만 아니라 말씀을 목에 걸고 마음판에 새기며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씀하시었다. 이처럼 말씀이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에 모두 말씀으로 물리쳤었다. 유태인처럼 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포켓용 성경을 늘 간직하고 다니면서 틈틈히 읽는다든가, 말씀을 구절구절 기록한 카드철을 가지고 다니면서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종종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말씀을 열심히 읽고 있는 성도를 보게 될 때 그 모습이 그처럼 대견스럽고 존중스럽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미국이 오늘날 말씀을 멋대로 왜곡하고, 말씀에서 떨어져 나감으로 점점 깊이 타락해 가고 있다. 자동차를 설명서대로 유지하지 않으면 쉽게 고장을 일으키는 이치와도 같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 밀려든 인본주의(
Humanism)가 마침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왜곡하여 동성연애도 죄가 아니고, 낙태도 죄가 아니라는 것이며, 혼전 섹스나 자유 섹스 등 무엇이든지 자기만 기분이 좋으면 OK라는 것이다.
특히 인본주의의 표본인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을 오히려 사회악으로 몰아 세운다. 그는 뻔뻔스럽게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그러한 법안도 추진한다.
동성연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주법이 이미 여러 주(州)에서 통과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공서는 물론 학교와 교회까지도 동성연애자의 모든 참여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보장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결국 미국 사회의 기본 질서는 송두리째 깨지게 되고「소돔과 고모라」처럼 망해버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시키기 위해 발악한다. 요즘 미국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출생
연장변형 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합법적인 시도들이 끈질지게 행해지고 있고, 동물의 기관을 인체에 사용하는 의술과 마약의 합법화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죄들이 자행되고 있다. 부모를 법원에 고소하여 재판을 통해 혈연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미 통제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에이즈(AIDS)와 마약이 확산되고 있고, 사탄숭배는 물론 사탄숭배 의식 때 고대 이스라엘 시대처럼 동물을 제물로 드려도 좋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올 정도이다. 사탄과 마귀들이 얼마나 깊숙이 미국 사회에 침투하여 관장하고 있는가를 알게 한다.
말씀을 모르거나 말씀을 왜곡하여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죄는 순식간에 밀려들어 오게 된다.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는 죄의 개념을 모를 때, 사람이란 으례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죄의 유혹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죄를 죄라고 판단하지 못하는데, 그 달콤하고 쾌락적인 죄를 안 받아들일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 다음 기능은 의지의 능력이다. 죄가 죄인 것을 말씀에 비추어 판단했다 하더라도 그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죄가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행하여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듭났어도 약해 빠져 마귀의 종노릇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의지의 능력은 기도에서 온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능력이 없어 죄가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죄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마귀들은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온갖 미끼를 다 던져 시간과 관심을 빼앗는다.
현대를 “
3S” 시대라고 한다. 현대인들이 Sex, Sport, Screen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전 세계는 그야말로 섹스 일색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 섹스 스캔들로 난리들이다. 공산주의에 억눌려 있던 동유럽이 섹스 산업으로 급격히 타락해 가고 있고, 한국의 경우에도 영계만 찾는 졸부들의 추태뿐만 아니라 주부 및 여대생들의 매춘과 원조 교제의 등장, 호스트바의 확산 등 IMF를 맞은 후 오히려 더 퇴폐해지고 있다는 보도이다. 전 세계가 가장 저급한 마귀군단에 의해 섹스로 농락 당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스포츠는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을 보고 즐기면서 시간을 빼앗기는가 하면 골프 등은 직접 치고 즐기면서 시간과 정신을 빼앗긴다.
스크린은 영화, 비디오, TV, 동영상을 모두 포함한다. 한국의 경우 가장 고질적인 분야는 TV 연속극이 아닌가 싶다. 인기있는 연속극의 경우 대다수의 국민이 TV 앞에 꼼짝없이 붙들려 정신을 쏙 빼앗긴다. 도둑놈도 이 시간에 집 안을 턴다고 하지 않는가? 특히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마귀의 속성, 즉 간음(불륜), 음행, 더러운 것, 음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음, 다툼, 질투, 분노, 투쟁, 분열, 이단들, 시기, 살인, 술 취함, 흥청거림 등등을 마치 사람이란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정당하다는 듯 조장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연속극들을 몇 년 이상씩 보게 되면 영이 메마르다 못해 파괴되어 버린다.
국내에서는 사소한 말다툼에도 언성을 높이고 삿대짓을 하며 혈기를 부리는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해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해외에 나온 한국인들의 추태로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KAL의 괌 추락 사건 때였다. 유가족들의 슬픔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봉사를 나온 본토인들과 몸싸움을 하고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이자 그들이 혼비백산하는 광경이 미국 TV 뉴스에서 방영되었었다. 같은 슬픔을 당해도 외국인들은 그저 조용히 흐느낄 정도이지 그처럼 감정표현은 하지 않는다.
요즘 미주교포 사회에서도 이 연속극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 주부들이 연속극 비디오를 한 보따리씩 싸 가지고 가 밤늦게까지 보는 집들이 많다. 그러는 사이에 영은 파괴되고, 자기도 모르게 극 중 인물처럼 변화되어 혈기를 부리는 등 마귀의 속성들을 그대로 닮아간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TV 연속극을 미국의 Soap Opera처럼 낮 시간 대에만 하고 저녁 Prime Time에는 교양프로나 이성적인 시사프로, 다큐멘터리 등으로 대체해야 한다. 치졸한 감정적인 국민이 되어서는 이성적인 서구인들을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다. TV 연속극이 한국인들의 심성을 파괴시키는 가장 못된 주범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 ※ HanSaRang 註. ─ 요즘 한국에는 ‘미드(미국 드라마),’ ‘일드(일본 드라마)’라고 부르며 많은 젊은이들, 성인들이 여기에 중독되어서 ‘드라마(Drama)’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데, 영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제작자들도 올바른 중심을 가지고 제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왜? 왜?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거기에 맞는 열매들이 이 사회에 열리게 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 사회를 죄와 악으로만 가득차는 사회로 만들 것인가, 공의와 정의와 질서와 사랑과 따뜻함이 가득찬 사회로 만들 것인가? 제작자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도 올바른 가치 기준이 세워져서 선과 악, 빛과 어둠,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드라마 작가들이 정말로, 더욱 많은 공부를 하고 극본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최고의 시청률을 보장하는 작가라고 불리우는 "김수현"씨에게는 왜 그렇게 지저분하고 저급한 극본을 쓰는지 묻고 싶다! 불륜, 음행, 더러운 것들.... 김수현 씨의 중심에는 어떠한 것들이 담겨있는지묻고 싶다! 가뜩이나 더러워지는 사회를 왜 그렇게 더욱 더럽게 만드는지 묻고 싶다! 더러운 것들을 끄집어내어서 깨끗하게 한다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르는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그렇게 인생에 대해서 모르는가! ]

마귀들은 이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도들의 주위를 맴돌며 시간과 정성을 빼앗고 쓰러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엄연한 현실을 깨닫고, 참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며 매일매일 기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특히 새벽기도는 그날 하루를 죄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게 된다. 기도도 머리와 입술로 하는 육신적인 기도가 아니고, 성막의 안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기도, 그리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기도를 올릴 때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수가 솟아오르고 마음이 온전히 바쳐져 하나님의 보좌 앞에 꽂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쉬지 않고 기도의 생활을 할 때 능력을 받아 죄의 유혹이 들어와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치고 강력하게 미혹하는 악한 영이 세상을 덮치고 있어서 사람들의 판단력을 둔하게 하고 흐리게 하는 시대에는 기도를 얼마간만 게을리 해도 벌써 영 속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어느새 죄의 유혹이 물밀듯 쳐들어와 쉽게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되며, 마침내는 개가 토한 것을 핥아먹듯 마귀에게 다시 종노릇하는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마지노선임을 명심하여 매일매일 생활화하고 특히 대장되시는 주 예수님을 앞에 세우며 성령님께 순종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여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의지로 자기를 지킨다면 사탄과 마귀들은 속수무책이며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가? 과연, 어떠한 글이 바른 진리와 분별력과 지식과 명철과 지혜와 생명과 화평과 참된 만족을 주는가?
진실로, 인간에게는
「Canon」(절대 진리절대 가치절대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을 올바른 성경적 ‘믿음’(가치관, 세계관)위에 세울 수 있을까? 』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08. 1. 13. 주일....
HanSaRang...

&
King James Bible 1611

9 진실로 낮은 자들도 헛것이요, 높은 자들도 거짓이니 그들을 저울에 달면 모두 합쳐도 헛것보다 가볍도다. 4 사람은 헛것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나이다. 』(시편 62:9/144:4)

『 그분 앞에 모든 민족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 민족들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곧 헛것보다 못하게 여겨지느니라. 』
(이사야 40:17)

25 이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들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니라. 14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 또한 헛것이라. 』(고린도전서 1:25/15:14)

『 “소경에게 길을 헤매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말하기를 “아멘.” 할지니라. 』
(신명기 27:18)

『 눈이 있어도 소경이며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들을 데리고 나오라. 』
(이사야 43:8)

『 그대로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 』
(마태복음 15:14)

『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
(누가복음 6:39)

『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 』
(마태복음 7:15)

『 또 내가 이것을 아노니,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 』
(사도행전 20:29)

『 보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 』
(마태복음 10:16)

『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 』
(마태복음 23:15)

『 아무도 너희를 헛된 말들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는 이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니라. 』(에베소서 5:6)

『 유다의 고관들은 경계를 옮기는 자들 같았으므로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 위에 물같이 부으리라. 』
(호세아 5:10)

『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라. 』
(고린도후서 11:14)

『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
(베드로후서 2:1)

『 아무도 너희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노략질하지 못하도록 주의하라.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Bible Believers.

설교 듣기 】

날짜ː 2007. 4. 15.오전
제목ː받아 먹고, 또 마시라 이 송오 목사
경구절ː〔 마태복음 262629
시간ː3338
주소ːmms://211.200.28.142/bbc/20070415am

날짜ː 2007. 3. 18.오전
제목ː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송오 목사
경구절ː〔 로마서 121721
시간ː4235
주소ːmms://211.200.28.142/bbc/20070318am

Bible Belie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