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희생 ” (양육/성장)
────────── THE PATHWAY OF FAITH ──────────
『9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곳에 와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고, 10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죽이려 하는데』(창세기 22:9, 10).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실행하시는가?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완전히 주님께 아들을 드렸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마음에서 그를 살해한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고 말씀하신다.
『11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더라. 12 그가 말하기를 “네 손을 아이에게 대지 말고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는 줄을 아노라.” 하더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더니, 보라,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그 뒤에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숫양을 잡아 와서 그의 아들 대신에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불렀더니, 오늘까지도 말하여지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이 보여지리라.” 하더라』(창세기 22:11∼14). 여기 또 다른 갈보리에 대한 놀라운 묘사가 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이삭을 드린다. 그의 마음 속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인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대신 할 숫양을 준비하심으로 그를 돌려 주신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 하나는 ‘22:8’에 있는 예언적 말씀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문자를 뺄 것이다. 그러나 그 생략으로 그것이 완전한 문장을 이루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나는 단지 “자신을”이란 한 단어만을 뺐다. 자, 이제 원래대로 그것을 다시 넣어 보자.『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창세기 22:8).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확히 행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나를 위한 번제 희생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에게 화목케 하셨다.
누구도 죄인을 대신할 수 없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해 합당한 희생제물로 죽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죄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많이 타락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셨다. 그리고 아무도 거룩한 자가 없는 것을 아셨다. 제물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완전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독생자 예수께서 당신과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아브라함이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대신 사용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나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으셨다. 가시덤불은 죄에 대한 저주를 상징한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셨다. 그리고 땅에 가시덤불이 생길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머리에 강제로 밀어 넣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다. 그것은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당신과 나의 죄의 덤불에 잡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당신은 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어떤 특별한 축복을 계획하실 때, 그 축복에 대해서, 그리고 축복으로 인도하는 길에 있어서 사형선고를 내리실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이 이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길 원한다. 당신들 가운데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기를 원한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성되기 위해 죽음의 일격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허락할 것인가?
나는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을 보아 왔다. 의사들이 포기한 어떤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이 아이는 아마 이 밤을 넘길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어린 아이의 생명을 살려 주시도록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탄원하고 탄원한다. 그러나 생명은 계속해서 꺼져가고 꺼져간다.
그때에 목사가 들어와서 부모에게 함께 기도하며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보다 그 아이를 더 원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가 팔에 안긴 어린 아기로 있을 때 주님께 그 아이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주님이 이 아이를 가지시도록 내어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밤이 주님이 그 아이를 원하는 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정녕 그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를 포기하기 원치 않습니다.” 그후 그들은 다시 돌아서서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그동안 이 작은 생명은 점점 더 멀리 꺼져간다. 마침내 모든 것이 소망이 없어 보일 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은 깨어지고 그들은 주님께 항복한다. “만일 당신이 그 아들을 원하신다면 좋습니다.” 그때 기적은 일어나고 아이는 산다. 어째서인가? 이삭은 그 부모의 마음에서 죽는다. 그리고 즉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이 되어 다시 돌려진다. 그 부모들은 아브라함이 배운 것과 같이, 믿음을 사람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일을 배웠다. 그와 같은 경험을 수백의 다른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잠시 부모의 심령을 상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신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신다. 나는 한 어머니가 아이를 남겨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영화롭게 한 세 가지의 다른 경우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걸을 수가 없었고 정신적으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그는 약 이십삼 년 전 그가 어린 아이 때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요청했던 때처럼 140 킬로그램이 되는 신체 속에서도 여전히 무기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그 어머니를 고통에서 건지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한사코 주님께 맡기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영화롭게 하셨다.
결코 하나님께 강압적으로 어떤 일을 요구하지 말라. 당신의 요구는 응답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행한 그 날을 슬퍼할 수 있다. 도리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라. 당신은 이삭을 죽여야만 할 때가 온다. 이삭은 많은 경우에 당신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것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삭에게 죽음의 선고를 내리실 것이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로 충분히 설득된 장소로 가야만 한다.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 그것이 내게 좋습니다.”
이삭의 또 다른 형태는 신학교에 다니는 두 젊은 학생에 대한 어떤 사건에서 예시된다.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하루는 젊은 여학생이 내게 와서 말했다. “당신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앉았다. 여기 그녀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죠지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제를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이래 우리는 함께 잘 지냈고 서로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성숙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죠지를 전심으로 사랑했고 죠지도 저를 사랑했습니다.”
“1931년 주님은 전 시간을 주님의 일에 드리도록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가 나를 어디로 원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이곳 성경학교에서 나는 남미 기도 모임에 갈계획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남아메리카로 부르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죠지를 아프리카로 부르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프리카로 부름받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죠지는 주님께서 단지 우리를 헤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데려가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죠지는 졸업하자마자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입니다. 그는 나의 교육이 끝나자마자 내가 그곳으로 오기를 원합니다. 죠지는 내가 진실로 염려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로 떠나는 것과 그와 헤어지는 것을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젊은 학생이 이야기를 다한 후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충고는 그녀가 죠지를 전송하고 헤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기 어려운 충고였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따르기는 더욱 어렵다. 나는 그녀에게 하나님께는 결코 실수가 없으시다는 사실과 그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걸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려야만 한다고 말해 주려고 애썼다.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1937년 12월 아프리카로 향하는 죠지를 전송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따라가겠다는 어떤 격려도 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대신에 내 인간 마음에 따라 약해져서 굴복할까봐 두려웠습니다. 어려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귀중한 뜻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일생에 대한 주님의 최선을 원했습니다. 나는 보다 못한 어떤 것으로 만족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이후의 날들은 시험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는지요!”
“그후 1939년 여름 나는 성경협회에서 연설하고 있었습니다. 선교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주님은 아주 명백히 마치 그분께서 나의 오른편에 계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나는 너를 아프리카에 원한다.’ 그리고 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죠지는 너의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명백히 주님이 나를 아프리카로 불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죠지를 내게 돌려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희생을 해야만 한다면 당신은 그 일을 하겠는가? 당신은 그렇게 당신의 이삭을 죽일 수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길에 대해서 아는가? 그 젊은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참아내며 주님을 첫 자리에 두었다. 당신은 오늘 그들이 하나님보다 무엇을 먼저 두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삭은 살해되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늘 나라의 어마어마한 영광스러운 보상이다.
그 이후 그 여학생은 말했다. “주님께서 시험과 시련을 보내시기 적합하다고 보시는 많은 때에, 나는 내가 그곳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매우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를 부르셨고 나를 그곳에 보내셨고 나를 죠지에게 돌려 보내셨으며 그곳에서 우리에게 사역을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최선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이 성경학교에서 시련과 기다림의 날들을 헛되이 보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뜻 안에 있는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의미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너의 이삭을 죽이라.”고 말씀하고 계실지 모른다.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첫 자리에 두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고 계실 때 당신이 어떤 친구와 소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의 생애를 난파선 속에서 산산이 부숴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신 자녀를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그 자녀가 선교지로 부름받을까봐 두려워 성경학교에서 준비시키기를 허락치 않고 있는가? 당신은 그 자녀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치러야 할 무서운 대가가 있을 것이다! 그분을 위해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내어드리라. 당신의 이삭을 죽이라. 그것이 오히려 당신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물질을 원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다면 당신은 심한 손실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의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영적인 일에 투자하라.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당신을 축복하시도록 하라.
‘창세기 22:14’을 보라.『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불렀더니...』.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물을 주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당신의 이삭을 기꺼이 드리겠는가? 성령님께 귀를 기울여 보라.
『주의 산에서 그것이 보여지리라.』(14b). 여러분이 하나님께 아무리 많이 드려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다시 갚아 주신다. 이것이 곧 믿음의 희생이며 그 보상이다.
인간의 견해로 생각할 때,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막대한 대가가 요구된다. 아무리 그 희생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의 무한한 부요 속에서 우리에게 여러 배로 갚아 주신다.
그렇다. 경건한 사람은 시험을 받는다. 그러나 그 시험은 그것에 응하는 사람에게 지극히 풍성한 것을 돌려주도록 허락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을 위해 즐겨 “전력을 다하려” 하는 남녀와 예수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기꺼이 두려는 남녀와 하나님께서 무슨 대가를 요구하시든지 기꺼이 치르려는 남녀를 갈망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영화롭게 되게 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을 떠맡으시고 축복해 주시도록 성령님께서 함께하기를 바란다.『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22:8b). 이삭과 그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버지, 당신과 당신의 하늘 아버지와는 어떠한가? 당신은 실제로 주님과 대화하는가? 당신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오, 주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를 온전히 맡아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의 이삭을 드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의 모든 일에 주인이 되게 하라. “만일 그분이 당신의 모든 일에 주인이 아니시면, 그분은 당신의 주님이 아니시다.” 그분께 최고의 자리를 드리라.『그분은 융성해야만 하나, 나는 쇠잔해야만 하리라』(요한복음 3:30).
(A-men, Hallelujah!)──────────────────────────────
조지 H. 문델/『 믿음의 좁은 길 』ː 제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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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thway of Faith
by
George H. Mundell
Pastor, Maran∼atha Tabernacle
Bible Teacher and Conference Speaker
Instructor, Bible Institute of Pennsylvania
1997/Korean by 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
Seoul, Korea【 & 제20장ː믿음의 희생(창세기 2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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