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9. 21:43

“ 내 백성은 생각지 않는도다 ” (양육/성장)

내 백성은 생각지 않는도다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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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은 생각지 않는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예언하던 날들에 이스라엘에게 하신 책망이었다. 이와 동일한 책망이 주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과 관련해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머물러 있다. 그분의 사역 내내 그분은 자신의 다시 오심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이후 그 약속을 확증하셨다. 그분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 소망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성경 마지막 장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신 마지막 메시지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다.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년같은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시간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숙고해 보면서 다니엘은 “그 때가 길다”고 한탄했다.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기 전에 70년의 일곱 배가 지나가야 함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신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 땅을 소유하기까지는 4세기 이상의 시간이 경과했다. 자, 19세기 이상이 흘렀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러한 약속의 관점에서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환란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가장 저급하고 시시한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에 대한 논쟁에서 한 걸음 비켜 서도록 하자. 그리고 주께서 오신다는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냥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이토록 오랫동안 연기되었다는 당황스러운 사실 때문에, 전에는 그렇게 해보지 않았을지라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부어주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주님의 오심을 현재의 소망으로 고대하도록 가르쳤다. 이 말이 변명에 지나지 않거나 실수라고 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말이다. 그것은 사실을 논하고 있지 않은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스라엘의 이집트를 탈출(Exodus)하는 기사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 카나안이 눈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시내 광야에 진영을 치고 며칠간 사막을 가로질러 행군했다. 그리고 탈출한 두 번째 해에 카나안 땅 경계로 인도되었고, 그곳으로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카나안의 안식은 메시야 왕국의 약속된 안식의 모형이었다. 그 안식은 다시 다윗 안에서 선포되었으나(시편 957∼11/히브리서 47), 그들은 불신과 그 불신에 기인한 배교로 나아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포로였던 다니엘에게 그 약속의 성취가 7년의 70배 동안 더 지연될 것임이 계시되었다. 그 약속은 마지막으로 오순절에 설교되었으나, 결국 불신으로 인해 그들은 다시 한 번 잃어버리게 되었다. 계속되는 불신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거절의 기간은 19세기나 된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것같은
“교회의 소망”에 빛을 던져 준다. 주께서 자신의 약속에 주의하지 않으신다는 불경스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되면, 이토록 길게 연기된 것은 지상에 있는 그분의 백성이 신실하지 않아서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베드로후서
3장은 이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 구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나 이단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결국 심판의 불로 내어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불신자들이 조롱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가 “헤아릴 수 없는 수 백만 년 동안 이 지구는 생명과 죽음의 무대였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옳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태초에”(그 태초가 언제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형체가 없고 공허하게”(창세기 12)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비록 아담이 창조되기 전의 모습은 공허한 상태라 해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세상은 결코 헛된 창조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완전한 창조를 하셨는데, 12에서 대격변이 있었다는 말이다. 베드로후서 35, 6은 바로 그 대격변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했다. 베드로후서 34에서 “그가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도 연관되지만,하나님의 날”(베드로후서 312), 즉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불타 없어지는 날에 관해 조롱하는 자들의 말이기도 하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창조의 시작부터 모든 것들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창세기 12의 시대와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와 같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과 관련해서 “성경과 과학 사이에 있는 대립”은 주로 창세기를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창세기 13 이후는 땅이 처음 창조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기 위한 집으로서 다시 꾸며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이 문맥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불바다를 연기하고 계신다. 세상은 그 불 속으로 마침내 삼켜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의 성취를 연기하시는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날이 오는 것”은 지상의 모든 불경건한 사람들이 그 땅과 함께 끝없이 멸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주 예수님의 오심 너머에는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가 있는데, 그것은 땅의 민족들에게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생명”과 같다. 그리고 거기에는 또한 신음하는 피조물들의 해방이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 즉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또한 그 약속이 실패했다는 생각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도 없다. 과거에,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성취시키지 않으신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노와 심판에 관한 말씀 중 일부였을 뿐이다.
(※ 예를 들어 출애굽기 321114/요나 310 참조.)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이 난제의 해결책을 거부한다면 다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임시적인 사건이나 영향에 대해서는 한 순간이라도 숙고해 볼 가치가 없다. 부분적인 것이나 단순히 지엽적인 것도 숙고해 볼 가치가 없다. 우리는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고동치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계속 수십 세기 동안 작용해 온 명분을 찾아야 한다. 귀납적 과정으로 본다면, 지상에서 교회가 걸어 온 악한 역사가 그 신비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반복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는 하늘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 때문에 누룩으로 오염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런 오류로 인해 만연하게 된 미신들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미신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충성에 관해서도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다음의 인용문들은
1864년 ‘캐논 T.D. 버나드’의 뱀프톤 강의록에서 인용한 것인데,(※신약에서의 교리의 발전The Progress of Doctrine in the New Testament, Macmillan & Co.)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서고에 꽂혀야 할 위대한 책이다.

“교회의 아침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발전은 얼마나 신속한가! 너무도 훌륭하게 시작되어서, 그 미래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어떤 기대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기대들은 희망찬 마음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그러나 곧 구름이 끼게 되었다...”
“사도들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실제적인 상태와 가시적인 상황으로 볼 때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예언을 잘 알게 되면 교회 역사의 전망이 훨씬 더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도들 중에서 서신서를 끝맺으면서 현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교회역사가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한 사도는 없었다. 그 저술들에서는, 공기를 깨끗케 해주는 지나가는 폭풍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대기가 미래의 험악한 폭풍우와 죽음의 요소들로 채워진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관찰한 사실은, 미래에 대한 이런 예견들이 단순히 서신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끝으로 다가갈수록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교리들이 완전히 형성된 이후로, 개인의 구원과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 가장 분명한 빛 속에서 자리를 잡은 이후에로, 역사에는 그림자들이 드리워지고 더욱 깊어져 갔다.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말과, 사도 요한과 사도 유다의 서신서들에는 그런 역사의 성향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저술들은 묵시의 전주곡이자 길이라고 하겠다.”

신약 정경이 완성된 때부터 교부 신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당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그들의 저술에서 교회사를 모아 보면, 이스라엘의 배교의 날들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보통 개신교인들은 기독교계에 수치를 가져온 악덕을 중세 시대 로마 교회의 배교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실상 개신교회들에 의해 과장되고 있는 교부들의
“원시 교회”가 발전해서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었다. 이에 관한 풍부한 증거를 찾으려면, 이런 악한 조류의 뿌리를 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사람들의 행동들과 말들을 보기 바란다. 소위 모범적인 기독교 고전으로 불리는 수많은 저서들에는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거나 감추어져 있다. 물론 여기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발췌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마지막 사도가 죽은지 약
1세기 후에 시프리안이 태어났다. 우상숭배 속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중년에 회심했으며, 그후 3년 뒤에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고, 10년 후 발레리안 박해 때에 순교당했다. 다음의 말은 그 시대의 교회의 상황을 보여준다.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비방들이 있었다. 감독들은 농부들, 무역업자들, 돈놀이꾼이었으며, 항상 정직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 무지해서 초심자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장로들은 우상들을 제조하는 일을 도와서 돈을 벌었다.”(※ 프럼머 박사의초기 교부들의 교회Church of the Early Fathers7장.)
시프리안 시대의
“교회의 처녀들”(현재는 “수녀들”이라고 부른다.)은 성스럽게 여겨지고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의 한 탁월하고 거룩한 사람의 말에서 그때 당시의 성스러움으로 통하던 것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처녀들이 난잡한 혼욕을 하고 있다. 그것은 여자의 정숙함에 관해 가장 일반적인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이 자주 다니는 곳들은 극장보다 더 불결한 장소다. 거기에는 정숙함이라고는 전혀 없다. 너희들의 옷으로 명예와 겸양을 내던져 버리는 것 아닌가?”(※ De Habitu Virginum.)
이 말들이 기록되기 반 세기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저급한 도덕성에 몹시 슬퍼했으며, 그가 말한 바와 같이
“순교의 샘이 매일 흘러 넘치고 있다.”고 말한 때조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교회 출석을 언급하며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거기에 남겨두고, 밖에서 불경건한 시덥잖은 일들에서 자신들의 쾌락을 찾고, 사랑 노래들과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것들, 즉 흥청망정 떠들며 노는 일에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다
“콘스탄틴의 회심”으로 집 안에 숨어 있던 교회가 자유롭게 되고, 외부의 방해 없이 세상에 드러나는 데에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크리소스톰이 단 한 번의 감찰에서, 성직 매매와 방탕한 것을 이유로 13명이나 되는 감독들을 해임한 사실로 그 당시의 안일한 교회 상황을 판단해 볼 수 있다. 감독직에 선출되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한 수단과 관련해서도 이런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들을 살인자들로 채웠고, 이런 지위들을 얻기 위해 싸우면서 도시들을 황페화시켰다. 누구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이런 일들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해야겠는가?”
그는 더 낮은 서열의 성직자들의 악덕을 다루는데도 동일하게 엄격했다. 그 결과 당연스런 결과가 뒤따랐다. 교회는 공회를 소집했고 거기에는 사람들이 꽉 메워졌다. 그리고 그에게서 대주교직을 박탈했고, 그는 니케아로 쫓겨났다. 그러나 평신도들의 격렬한 분노로 인해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온 것은 대중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움 없이 신랄하게 교회의 부패와 비도덕성을 비난하자, 법정은 더 교묘하게 준비된 또다른 공회를 소집했다. 그의 두 번째 추방은 사실이 증명해준 바와 같이, 사형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그는 실질적으로 순교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교회에다 복수해 줄 것을 하나님께 피로써 외치는 위대한 무리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방탕함과 성직 매매의 악덕들은 교회 내에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며, 크리소스톰의 눈에만 특별하게 보인 것도 아니었다.
A.D. 370년에 황제의 칙령이 로마 교회들에서 낭독되었는데, 그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승들이 과부들의 집이나 여자들의 숙소에 자주 들르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이 여자들에게 종교를 핑계로 너무 들러 붙었던 것이다. 그 칙령은 또한 성직자들이 자신의 몫으로 챙기게 될 기부금이나 유산은 몰수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칙령은
20년 뒤에 다른 사람의 의해서 강화되었다. 이 주제에 관해 제롬은 이렇게 말한다. “말하기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교도 사제들, 서커스에서 무언극을 하는 사람들과 마차 운전자들, 창녀들이 유산을 받도록 허락되었다. 그리스도인 통치자들은 성직자와 수도승들이 유산을 받는 것을 금지시켰다. 내가 그 법률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런 법률의 적용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워즈워드의교회사3권, 92쪽.) 제롬에 따르면, 사람들은 실제로 여자들의 사회에 쉽게 접근해서 여자들을 이용하기 위해 성직을 얻고자 할 정도로 악덕이 심히 컸다. 최소한 그는 그 당대의 성직자들의 악덕에 대해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여자들 사회의 상태에 대해 그가 묘사한 모습은 너무나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요즘의 작가가 설명한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덧붙인다. “만약 그토록 큰 영향력을 가진 사제들이 그렇게 부패했다면, 사제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의 품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딜의로마 사회Roman Society, 113쪽.)
알렉산드리아의
“성(聖)” 시릴에 관해 ‘딘 밀만’(Dean Milman)은 이렇게 적고 있다. “야망, 음모, 오만, 약탈, 폭력이 비그리스도인적인 수단으로 배척되고, 야만성, 박해, 유혈이 거룩하지 못하고 복음적이지 않은 사악함으로 배척된다면, 이 정통주의자 시릴은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는 최악의 이단 중 하나로 정죄될 것이다.”
이것은 하이파티아(
Hypatia)를 살해하는 도덕적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매우 온화한 평가라고 하겠다. 이 사람은 악명 높은 폭도 지도자이며,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한 사람으로, 유대인 수천 명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내쫓고 그들의 집을 약탈했다. 이 난폭한 이교도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네스토리우스 이단들’을 다룬 에베소 공회(A.D. 431)를 지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릴은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네스토리우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것도 가장 저급한 정치적 싸움 못지 않는 방법으로 정죄를 했다. 그 정죄에는 폭도들을 고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만연한 무질서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것이어서 황제는 공회를 해산하며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시거니와, 내가 이 혼란을 조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런 죄를 진 사람은 발견되어 처벌될 것이다. 각자의 지역으로 되돌아가서 개인적으로 덕을 행함으로써 각자의 모임에 있는 악행과 비방을 회복하기 바란다.”(※ 이것은 “에큐메니칼 공회들” 중 하나로, 종교 개혁 이후 영국에서 승인된 것이다. 18년 후 에베소 공회의 “정통주의” 대다수는 건달들을 고용해서 이용했으며, 비쟌틴 주교인 프라비안(Flavian)은 짐승같은 대우를 받고 그 상처로 죽었다. 이는 캐논 리돈(Canon Liddon)이 뱀프톤 강의록에서 “원시 기독교계의 계화된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다마수스와 울시누스가 교황적 쟁탈전을 벌일 때, 한 로마 교회의 포장도로에서는 하루에 131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교회사에서 철저히 감추어져 있기에, 상당한 분량의 책을 찾아본다 해도
“교부들의 원시 교회”의 명백한 배교를 입증할만한 증거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인용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마르세이유의 살비안의 초기 생애는, 카톨릭 교회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인 제롬과 어거스틴과 동시대로, “콘스탄틴이 개심”한 이후 1세기가 흐른 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나라에서 가장 두려워해야만 했던 “박해”는 이들의 악덕과 범죄에 기인한 것인데, 즉 사람들이 이교도로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끔찍할 정도로 엄격한 형법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신 것처럼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살비안은 이렇게 답한다. “실제로 사방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런 다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그런 사람들이 어떤 호의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라. 매일 우리 눈에 비치는 현상들은 교회의 방탕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불쾌해 하시는 것들뿐이다.”
다음은 같은 글에서 발췌한 더 심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지 않으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도 음울한 이야기이다! 마땅히 하나님의 노를 가라앉히는 존재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악에서 도망하는 극소수만이 거기서 예외일 뿐이며,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악덕으로 이루어진 시궁창일 뿐이다. 교회 내에서 술꾼이나 탐식가, 간음자나 음행자, 매춘굴에 다니는 사람, 강도나 살인자가 아닌 사람은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나는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제시하는 바이다...”
“교회들은 상스러움으로 모욕을 당한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약탈하러, 어떤 사람들은 술 마시러,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하러, 어떤 사람들은 도로에서 강도짓을 하러 간다...”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숫적으로 거의 균형을 이룬다고 믿을 수 있다면 어떻게 크게 기뻐하며 기쁨으로 뛸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행복하겠는가. 거의 모든 전체 회중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슬퍼해야만 할 뿐이다.”

초기 기독교의 성장을 설명하면서 불신자인 깁본은(Gibbon)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탁월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의 훈육과 적절한 규칙들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세기 후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악덕을 모아놓은 시궁창이 되어 버렸다.”(※ 원시교회를 이렇듯 끔찍하게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살비안의 글은 테일러의고대 기독교Ancient Christianity에 나오는 것으로, 어거스틴과 다른 교부들의 글을 인용해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앞의 글들은기독교계의 부처The Budda of Christendom에서 발췌한 것으로,성경이냐 교회냐The Bible or the Church로 재출간되었다.)
이와 연결시켜서 중세 교회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중세 교회는 주를 두려워하고 진리와 의를 따랐던 사람들의 박해자이자 마귀같은 원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수에 대한 평가는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교한 수백만 명 중 단 한 사람도 하늘에서는 잊혀지지 않겠지만, 지상에서의 기록은 전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확실한 사실이며,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편에 계셨다. 기독교 교회는 지상에서 알고 있는 가장 끔찍한 지옥의 권세가 구체화된 모습이라 하겠다. “거기에는 칼이나 화형대나, 고문실이나 암살시키는 단검이나 어떤 수단이라도 괜찮다. 그 교회의 활동은 폐허가 된 국가들과 연기나는 도시들, 분개한 미치광이처럼 서로 갈기갈기 찢는 인간들, 그리고 창조주의 이름으로 행한 끔찍한 범죄들로 그분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에서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현재는 잊혀졌으며, 또한 잊혀지고 있고, 심지어는 대담하게도 부인되고 있다.”(※ 프로우드(Froude)의트렌트 공회Council of Trent〉.)
종교 개혁의 교회들은 어떤가? 여기 또 한 사람의 증인이 하는 말에우리의 주의가 끌린다. 다음의 내용은 마태복음
1243, 44(※『43 더러운 영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 물 없는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자, 44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왔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비어 있고, 소제되고, 단장되었더라.』) 기록된 주님의 비유에 관한 딘 알포드(Dean Alford)의 주석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비유가 직접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고 설명한 이후에 그는 계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교회사가 이와 유사하다는 것에 특히 주의가 끌린다. 사도 시대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로마 교회는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다. 포로기가 유대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종교개혁이 기독교계에 끼친 영향과 같다. 첫 번째 악한 세력은 추방되었지만, 위선, 세속성, 합리주의의 성장으로 그 집은 텅 비어 버리고, 문명화로 생긴 예절들과 세속 지식의 발견으로 장식되었지만, ‘살아있는 진지한 믿음’은 사라져 버렸다. 예언을 읽어야 하는데도 읽지 않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진보한 것같은 이런 상황에서 죄의 사람이 마지막으로 도약하려는 준비 과정을 볼 수 없다. 우상숭배와 악한 일곱 영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계를 무시무시한 종말로 이끌 외적 구조를 드러낼 때 죄의 사람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딘 알포드가 오늘날 우리들과 함께 있다면 더 격양된 목소리로 이런 글을 쓸 것이다! 반 세기 전에 영국 교회는 종교개혁의 원칙들에 대담한 증거들을 제시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셨다는 것을 증거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진리들을 증거했다. 이러한 비타협은 나라 전역에서 강력한 영적 힘을 지녔다. 그러나 오늘날은 라오디케아에 보내는 서신이 사방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들이 스스로 아무리 자랑스럽게 여겨도 “살아 있는 진정한 믿음은 사라져” 버렸다. “지식의 나무는 이제 가장 잘 익은 그 열매를 맺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는 누구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약속했다. 그리고 종교개혁 때 성경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마귀는 수 세기 동안 발버둥쳐왔다. 이 때에도 마귀는 이전의 방법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인쇄술로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옛 뱀’은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훨씬 더 교활한 방법으로 이제 우리에게서 성경을 좀도둑질하고 있다. 성경이 책 중의 책이라고 갈채를 보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타락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힘은, 종교개혁 이전 시대, 즉 지상에서 발전하는 교회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 개혁 교회들은 이런 악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사탄의 최고 대리인들이다. 이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수호했다는 기억이 생생하지만, 오늘날 그런 간증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독일 합리주의자들의 가르침에 관한 스티어(
Stier)의 다음과 같은 경구는 오늘날 신학교들과 교회들의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것에 정확하게 적용될 것이다. “하늘과 땅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말로만 고백하는 지상의 교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참된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고 어떤 교회가 거짓 교회인지 가늠할 수 있겠으며, 참된 교회라는 것이 언제 배교하여 거짓 교회가 될지 가늠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참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늘에 속한 교회이다. 입으로 고백하는 기독교계에 속해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은 언제라도 배교할 수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스라엘도 그 기원이 하나님이었지만 결국 배교하고 말았다.
말로만 고백하는 교회에 속해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배교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순교의 시대에는 이런 변명이 인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는 더 확실하게 그렇지 않다.
이들의 냉담함은, 실제로 참된 기독교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악들을 못 본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들이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 상을 이교도적인 장식으로 바꾸는 것을 반대한다거나, 강단에서 “고등 비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몰아버린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배교 자체가 변장한 축복임이 증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는 것이 “주께 신실함”보다 더 우선시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회복될 것이라는 모든 소망은 사라져 버렸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유대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하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전체 회중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그분께 가치없는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분보다 자신의 교회를 더 사랑하는 것은 허용된 듯하다! 에베소에서부터 라오디케아에 이르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나타난 지배적인 관심사항은 개개인의 신실함, 즉 “이기는 자”이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사도 바울이 한 말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울려 퍼진다(사도행전 2029∼32).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다. 탐욕스런 이리들이 그 가운데로 들어올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단 교리를 선동하는 자들이 일어나고, 이교 종파의 지도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사도행전 20:32).
이것은 사도의 사역에 위기가 닥쳤다는 표시라고 하겠다. 그의 초기 서신서들에서는 교회들에게 말을 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어 있는 기간에 기록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는
“성도들”(Saints)에게 기록되었다. 사도 바울의 말에 공감하며, 크리소스톰은 3세기 후에 애통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들을 모방한 모조품들이 그 시대에 만연한 이단들 가운데 생겨났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성경」만 의지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이 모든 것이 고(故) 라일(Ryle) 감독의 훈계 속에서 메아리 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되며, 오직「주님」만을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의 범죄와 악덕에 관계해서 인간 본성을 연구하려 할 때, 인간 본성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마귀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탄을 말하지 않고는 인간들의 모든 종교는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된다. 사탄은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에, 세상의 종교는 사탄이 활동하는 주 영역이다.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사탄의 모든 공격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탄은 사람들의 지성을 눈멀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린도후서 446). 그러므로 사탄은 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공격 목표로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중요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성경에 대항해서 운동을 일으킨다.
종교라는 미신들로 인해 지성이 왜곡되거나 눈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살아 있는 말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오직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임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갈보리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거짓 것들이라도 믿을 수 있는 미신적인 피조물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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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앤더슨/『 잊혀진 진리들ː제9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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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OTTEN TRUTH
By
Sir Robert A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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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Rapids, Mi
2000Korean by Word Of God Preservaiton Society
Seoul, Korea

& 제9장ː그동안 교회 시대가 펼쳐지다 】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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