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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재선충이라는 벌레가 우리나라 산야에 가만히 침투하여 푸르른 소나무를 하나 둘씩 파먹어 들어가서 급기야는 산 일대의 모든 소나무가 벌겋게 변하더니 죽어 버리고 있었다. 그 벌레가 그렇게 무서운 줄 산림을 관리하는 부처에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누구의 탓이라고도 할 것 없이 피해를 당한 것은 산들이요 우리나라이다.
마귀가 교회에 침투하면 나무 같은 사람들이(마가복음 8:24) 하나 둘씩 병들어 쓰러지게 되며 그 결과 온 교회가 벌겋게 변해 버린다. 이 나라에는 죽은 교회들이 즐비하다. 그런 교회들이 밤이면 나무 십자가가 아닌 플라스틱 십자가에 불을 밝히고 세상의 네온과 함께 켜지고 꺼지고 하고 있다. 마치 퍼가모 교회시대(A.D. 325∼500)와 흡사하다. 퍼가모 교회는 스머나 교회시대(A.D. 200∼325)를 이어 계승되는 교회이지만 스머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스머나 기간은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말살시키려고 공식적으로 열 번의 박해를 가했다.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던가는 반카톨릭 교회사[《신약 교회사 (피터 S. 럭크만)》,《폭스의 순교사》참조ː말씀보존학회 刊.]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콘스탄틴이 등장하여 그리스도인 황제를 자처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에서 풀어줬으나 뒤이어 오는 물결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이교도들이 교회라는 곳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함으로써 성경이 필요 없는 무리들로 바뀌었으며 그들 이교도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거듭나지 않고 ‘세례’로 대신하여 교회 회원 명부에 이름을 올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도신경을 외우며 태양신의 날인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이라고 정하여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이교도의 풍습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자리잡음으로써 교회의 전통이 되고 교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 교회들 안에는 사도 바울이 전파했던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살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경과 교회를 세상에 팔아 그의 제국을 굳건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변혁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남겨 놓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 즉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들이 “남는 자들(Remnants)”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가 만연된 시대와 땅에서도 늘 그분의 남는 자들을 남겨 놓으시고 그들을 다시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이사야 11:11/16:14|예레미야 23:3|미카 2:12). 퍼가모 기간 동안 복음의 진리를 외쳤던 남은 자들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여기 몇 몇을 소개하면 안티옥의 요한(A.D. 441), 아일랜드의 성 패트릭(A.D. 389),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콜럼바, 알반, 꾸트베르, 피난이 있었고, 프랑스에는 라벤나의 피터와 엘지우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는 안스가르, 림버트, 리따르, 윌리브로, 엑버트, 바우버트, 하루팍, 트릭베슨 등이 있었다. 이들의 손에는 카톨릭이 불태워 없애려고 했던 헬라어 표준원문 사본이 들려져 있었다. 이 사본들이 곧 킹제임스성경의 저본들이었다. 바른 성경이 없는 사람들은 젊은 사자처럼 복음을 전파한 적도 없었고 오지의 선교사가 된 적도 없었으며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의 목사가 된 적도 없었다. 성경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나라는 성경적 기독교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되었고 그 대신 ‘한국식 기독교’가 자리잡고 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사람만 많이 모이면 정통이 된다. 그들에게는 성경이라는 바른 잣대가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 ‘자기 잣대’로 자기들의 신학과 교리를 재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사라지고 거짓이 난무하며 선이 사라지고 악이 지배하며 복음의 진리가 사라지고 경배와 찬양이 기독교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교회는 병고치고 귀신 쫓는 소굴로 변했으며 죄를 책망하지 않고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코미디 같은 설교 아닌 설교가 나가는데도 사람들은 ‘아멘’하고 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 14)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그들 좋을대로 하고 산다. 하나님께서는 늘 위기 때에 자신의 남는 자들을 부르시어 마귀가 구부려 놓은 길을 곧게 펴게 하신다(마태복음 3:1∼3).
요즘 거리에서 설교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간주한다. 복음을 듣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교회에 와서 돈 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다니기 편리하고 세상적으로 이름 난 교회에 적을 두고 주일 날 잠시 얼굴을 내밀거나 아니면 재직을 받아 그것으로 자기 믿음을 가리려는 사람들도 많다. 어두움이 짙을수록 빛이 그 가치를 드러내게 되듯이, 배교가 만연할수록 복음과 진리의 가치를 높이 들 수 있는 남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자기 사람들을 예비하시어 그 때가 차면 들어 쓰시는 것이 교회사의 증거이다. 가슴에 불을 품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다. 생명의 씨앗이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나오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살아있다면 이 어둡고 추악한 세태에서 복음의 기치를 들고 외칠 남는 자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랴”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내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하고 나설 남는 자들이 필요한 때이다. ────────────────────────── 인터넷 신문 '바이블 파워' (2008-1-7) ──────────────────────────
Bible Believ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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