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0. 23:21

“ 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 (설교 모음)

(설교 모음) [20120330] ● 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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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 영광을ㆍGLORY TO THE LORD 】

● 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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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931
19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매일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더라. 20 또 나사로라고 하는 어떤 거지가 있었는데 온몸에 헌데가 난 채 그 부자의 문전에 누워서 21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기를 바라니,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더라. 22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었는데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더라. 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 눈을 들어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가 그의 품에 있는지라. 24 그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라고 하니 25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26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고자 하여도 올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 27 그가 말하기를 ‘그러면 아버지여, 내가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께서 나사로를 내 아비 집에 보내어 주소서. 28 나에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그가 그들에게 증거하여 그들로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니 29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듣게 하라.’고 하더라. 30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아니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누군가가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라고 하니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다 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니라.’ 하니라.”고 하시니라.

나무를 평가할 때는 잎을 봐야 할까, 아니면 열매를 봐야 할까? 당연히 열매를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판단할 때에도 겉이 아닌 속을 봐야 한다. 실제로는 야생 올리브나무지만 겉으로는 잘 재배된 올리브나무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는 늑대인데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우리에게 “네 열매를 보여다오”라고 요구하신다.

─ 본문 중에서... ─

 땅을 흔드시는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권능이나 인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권능은 세상을 뒤흔드실 때 나타나고,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리는 세상을 다시 굳게 붙드실 때 나타납니다. 또는 하나님의 권능과 사람이 동시에 나타나는 때도 있습니다. 지진은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지진의 멈춤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 설교는 A.D. 388년 안티옥(Antioch)에 지진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 크리소스톰이 했던 설교이다.
  땅을 뒤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고, 땅을 다시 굳세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흔들려 무너지려고 하는 때에 다시 그것을 든든히 붙들어주십니다.
  지진이 지나갔더라도 두려움을 잃지 마십시오. 땅이 흔들리는 현상은 멈추었지만, 그와 더불어 경각심마저 사라져가면 곤란합니다. 안일한 믿음은 또 다시 지진을 불러올 것입니다. 우리의 열정을 새롭게 해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안일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또 다시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십니다(에스겔
3311).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디에서 도둑이 활개를 칠까? 어디에 탐욕이 도사리고 있을까? 어디에 독재가 있을까? 어디에 압제가 있을까? 어디에서 가난한 자의 것이 강탈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어디에 거들먹거리는 부자들이 있을까? 어디에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있을까? 어디에 협박이 있을까? 어디에 두려움이 있을까?”

  일순간에 모든 것이 거미집보다 더 쉽게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비명소리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고, 모두들 교회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로 마음 먹으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닥칠지 상상해보십시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재난에 대한 공포심이 우리에게 생생히 각인되어 굳은 결심을 다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뒤흔드셨지만, 우리를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멸하실 생각이셨다면, 우리를 뒤흔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뒤흔드신 이유는 우리를 멸할 생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지진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기 위한 전령(傳令
messenger)이었습니다. 지진은 공포심을 통해 깨달음을 주어 혹독한 심판을 모면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을 행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읍(
city)을 향해『...“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 34)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어찌하여 도시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으셨습니까? 멸하겠다고 위협하셨으면서도 왜 멸망시키기 않으셨습니까?”라고 여쭈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멸망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경고한 이유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다시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라고 여쭈면 그분은 “내가 위협하는 이유는 너희에게 미리 경고를 주어 내가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데 있다”라고 설명하십니다.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경고했습니다. 그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모두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크고, 또 그분이 모든 일을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행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깨달아 악(惡)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순간에 개개인의 생각과 의지를 간단히 꺾으실 수 있고, 심중(心中)의 토대를 온통 뒤흔드실 수도 있습니다.

 언제까지 세상의 일에 집착할 셈인가?

  장차 두려운 날이 이르면 심판은 일순간에 그치지 않습니다. 끝없이 지속되는 영원 속에서 강물처럼 넘실대는 불길과 엄위로운 분노가 죄인들에게 쏟아질 것입니다. 그날에는 하늘의 권능들이 죄인들을 끌어다가 무서운 심판대 앞에 무릎을 꿇기로 심판을 받게 할 것입니다. 하늘의 법정은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행위가 낱낱이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이웃도, 친척도, 부모도, 친구도, 조언자(멘토)도, 그 누구도 우리를 돕지 못합니다. 그날을 과연 어떻게 맞이할 셈입니까?
  제가 이런 두려운 말을 전하는 이유는 구원을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강철보다 더 날카로운 가르침을 베푸는 이유는 썩은 상처를 지닌 자들에게 환부를 도려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줄곧 말해왔지만,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세상의 일에 집착할 셈입니까?
  모두에게 말합니다. 특히 질병에 걸렸는데도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이 가르침은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병든 사람은 듣고 건강해질 것이고, 건강한 사람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재물이 언제까지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富)가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사치스러운 집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물질에서 쾌락을 찾으려는 욕심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보십시오!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재물이 도움을 주었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수고가 모두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재물이 그 주인과 함께 멸망하고, 건물이 건축자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도시 전체가 마치 공동묘지처럼 변했습니다. 부(富)가 어디에 있으며, 탐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거미집보다 더 형편없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씨 뿌리는 자의 사명

  “그렇다면 설교로는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누가 저의 말에 귀를 기울이든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뿌립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씨를 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어떤 씨앗은 길가에, 어떤 씨앗은 돌짝밭에, 어떤 씨앗은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지만,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집니다(마태복음
133). 세 곳에 떨어진 씨앗은 죽었지만, 나머지 한 곳에 떨어진 씨앗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농부는 경작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씨앗의 일부가 살아남기 때문에 그는 농작물 재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도 많은 양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 모든 씨앗이 저에게 추수의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니더라도 절반은 듣습니다.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이 듣습니다. 3분의 1이 아니더라도 10분의 1이 듣습니다. 10분의 1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 사람은 듣습니다. 그 사람으로 듣게 하십시오!
  한 마리의 양이 구원받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놓아두고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마태복음
1812). 저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인간, 곧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는 살아 있는 피조물입니다.
  설혹 그가 노예라 하더라도 저는 그를 멸시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의 신분이 아니라 덕성(德性
virtue)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가 자유인이든 노예든 상관없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혼(魂soul)입니다. 그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인간입니다. 그를 위해 하늘이 마련되었고, 태양이 떠오르며, 달이 차고 이울고, 공기가 주어지고, 샘물이 솟아나고, 바다가 펼쳐졌고, 선지자들이 보내심을 받았으며,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이 되셨거늘, 굳이 이런 말을 더 늘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 귀한 보혈을 아낌없이 흘리셨습니다. 그런 인간을 제가 경멸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많은 말씀을 건네셨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습니까?(요한복음
4742) 주님은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혼을 소유한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녀가 창녀라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도 구원받을 백성 가운데 하나였고, 또 큰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셨고, 그녀는 그 사랑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저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설혹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저는 말씀 전파를 중단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의사이기 때문에 처방을 해야 하고, 교사이기 때문에 조언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에게 파수꾼으로 세웠나니 내 입에 있는 말을 듣고 내게서 나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주라』(에스겔 3:17).
  지금까지 제가 누군가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을까요? 설혹 그렇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저의 임무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상급을 받을 테니 말입니다. 더욱이 저는 극단적인 경우를 언급했습니다. 많은 군중 가운데 올바른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이 단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뇌의 치유제

  부주의한 청중들은 대개 여러 가지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날마다 말씀은 들었지만 실천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들으십시오. 말씀을 들으면 자연스레 실천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여길 수 있고,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꾸짖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그것은 바로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아아, 말씀을 들었는데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에서 “아아”는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서곡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애통하는 마음을 가졌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죄의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나를 기억하라. 함께 변론하여 네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라.
Put me in remembrancelet us plead togetherdeclare thou, that thou mayest be justified.(이사야 43:26)

  죄 때문에 우울하고 낙심이 된다면, 그것이 곧 구원의 시작입니다. 물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낙심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죄로 인해 비애를 느끼는 것은 무가치한 변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내가 그의 길을 보았으니 그를 치유해 주리라. 또 내가 그를 인도하여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들을 향하여 위로를 회복하리라.』(이사야 57:18)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황송하면서도 불가해한 은혜이자 사랑이 아닌가요!

『 내가 그의 길을 보았으니 그를 치유해 주리라... 』

  죄로 인한 슬픔은 참으로 위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모든 고뇌를 치유하신다니 그 얼마나 위대합니까! 하나님이 일순간에 모든 것을 원상태로 복원하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죄를 두려워하라

  자, 지진이 잦아든 지금 모두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모두가 지진 그 자체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진의 원인이 더 두렵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사람들은 도시가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분노하셨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분노를 격발시킨 것이 두렵습니다. 저에게 두려운 것은 지진이 아니라 지진의 원인입니다.
  지진의 원인은 하나님의 분노이고, 하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형벌을 두려워하지 말고, 형벌의 원인인 죄를 두려워하십시오! 도시가 온통 흔들리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하지만 우리의 결심이 흔들려서는 곤란합니다.
  질병이나 상해를 당한 사람들을 보거든 치료가 가능한 사람이 아니라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염려하십시오. 죄를 질병이나 상해에 비유한다면 보응은 수술이나 치료약에 해당합니다. 제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목하십시오! 지혜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왜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형벌은 죄만큼 무섭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가 형벌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질병을 방치하는 사람 vs.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

  곪아터진 상처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고 구더기가 득실거립니다. 그런데도 그는 질병에 감염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같은 질병을 앓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은 의사들에게 소작시술, 외과수술, 치료약과 같은 처방을 받습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더 안타깝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질병에 걸렸으면서도 치료를 받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까, 질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이번에는 죄인 두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한 사람은 형벌을 받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형벌을 받고 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형벌을 받지 않으면서 부자로 잘살고, 고아들의 소유를 강탈하고, 과부들을 억압하는 사람을 행운아로 생각하겠습니까?
  겉으로는 그에게 아무 불행도 없습니다. 도적질을 일삼는데도 좋은 평판과 명예와 권세를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종종 겪는 불행, 곧 열병이나 중풍을 비롯해 그 어떤 질병도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의 슬하에는 자손들이 번창하고 늙은 말년에도 그저 안락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가장 안타깝게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에 걸렸으면서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종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몸이 부어오르고 비장에 통증을 느끼면서도 서둘러 의사에게 달려가지 않고, 냉수를 들이키며 날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기름진 음식과 과음을 일삼는 등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말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과연 행운아입니까, 불운아입니까?
  이번에는 또 다른 수종병 환자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질병에 걸렸지만 의사들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는 음식 섭취를 줄여 몸을 정화하고, 먹을 때는 고통스럽지만 뱃속에 들어가면 건강을 회복시켜줄 쓴 약을 억지로라도 삼킵니다. 이 사람이 앞의 사람보다 더 운 좋은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질병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보다는 질병에 걸렸지만 치료를 받는 사람이 훨씬 더 낫습니다. 물론 치료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는 건강을 회복시킵니다.

 지혜의 교사

  이제 말을 바꾸어 육체를 혼(soul)으로, 질병을 죄(sin)로, 쓴 치료약을 하나님의 보응(recompense)과 심판(judgment)으로 대체해 생각해봅시다. 약 처방과 외과수술과 소작시술이 의사의 소관이라면 징계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소작시술에는 불이 사용되어 감염부위의 확산을 예방합니다. 또 수술 칼은 썩은 상처를 도려냅니다.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 건강을 회복시킵니다. 수술 칼과 불이 질병의 확산을 예방하고 몸을 회복시키는 것처럼 굶주림과 질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불행은 우리의 혼을 유익하게 만듭니다.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가 하는 말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구원받을 희망이 둘 중에 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까? 모두가
‘가난한 자’라고 대답할 줄로 압니다!
  
“부자가 음행을 저지르고도 풍요롭게 살았으니, 나는 그를 행운아라고 부르겠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가난한 중에, 곧 굶주림 속에서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이유는 가난이라는 지혜의 교사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을 볼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질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치료할 수 있는 방법조차 없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이 불행을 겪는 것을 보거든 위로하십시오. 그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중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나름대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세상에서도 죗값을 치르고 사후에도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만 형벌을 받는 사람들도 있고, 내세에서만 형벌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 종류의 심판

  그러면 내세에서만 형벌을 당하고 현세에서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상관없이 모두 제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가르침은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현세와 내세에서 모두 형벌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다음의 성경구절이 입증해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 어느 성읍이나 촌락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아, 너희가 거기를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 12 그 집에 들어갈 때에 문안하라. 13 만일 그 집이 합당하면 너희의 화평이 그 집 위에 내리게 하고, 만일 합당치 못하면 너희의 화평이 너희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라. 14 아무도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나,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그 집이나 성읍에서 떠날 때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15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읍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 』(마태복음 10:1115)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자들은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또 내세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읍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15절)라는 말씀은 소돔 백성들이 현재 형벌을 받고 있는 중이지만, 고집스럽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장차 당하게 될 형벌만큼 심하지는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현세에서만 형벌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던 부도덕한 사람이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 너희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바로되 즉 어떤 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이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일이라. 2 그런데도 너희가 통곡하기는커녕 교만해져서 이런 행위를 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는도다. 3 내가 참으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이런 행위를 한 그 자를 내가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이미 판단하였느니라.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와 나의 영이 함께 모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15)

  이 경우 음행을 저지른 사람은 현세에서만 징벌을 당하고 내세에서는 징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가 내세에서 형벌을 당하지 않는 이유는 현세에서 그의 몸이 징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다가 내세에서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누가복음 1619)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미 이 말씀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계속해서 이어질 교훈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이미 많은 소득을 얻었다고 할 수 있기에, 저나 여러분에게 너무도 유익합니다. 줄곧 이 말씀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많은 의미를 깨달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말씀에 대한 교훈에 낯선 사람들도 있을 테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합시다.

 동정심을 베풀라

  교회는 몸입니다. 교회는 눈과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꿈치가 가시나무를 걷어차면 눈도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래를 내려다보기 마련입니다. 눈은 “나는 이 높은 곳에 있으니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지체를 우습게 알겠다”라고 말하지 않고, 허리를 굽혀 위치를 낮춥니다. 발꿈치보다 더 낮은 것이 무엇이며, 눈보다 더 높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동정심이 그 간격을 메우고, 사랑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듭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해가 빠른 사람은 이미 말씀을 들을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지만,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형제를 배려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즉, 눈을 낮춰 발꿈치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해가 더딘 형제가 이 교훈을 충분히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동정심을 베풀어야 합니다.
  뛰어난 지성(知性)을 형제를 멸망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능력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혼자서만 풍요를 누리고 다른 형제는 빈곤에 허덕이게 하지 마십시오. 발꿈치에 해당하는 형제는 가시나무, 곧 이해력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허리를 숙여 가시나무를 제거해 주십시오.

 혼의 굶주림

  자, 그러면 말씀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누가복음 1619)라는 이 말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겉으로는 부자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는 자색 옷을 입고, 진수성찬을 배설하고, 포도주 잔을 꽃으로 장식하고, 날마다 주연을 즐깁니다. 그와는 달리 무척이나 가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였습니다.
  그러면 부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어디에도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부자였을까요? 비유로 말하면 그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와 같았습니다. 상수리나무는 크고 높게 자라 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도토리를 제공하지만, 말씀의 부자는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아무 열매로 맺지 못했습니다. 재물을 강탈해 모으는 것은 늑대의 소행이나 다름없습니다. 또 재물이 있어도 무자비한 사람이라면 사람이라기보다 사나운 맹수에 불과합니다. 말씀의 부자는 추악한 악에 치우쳐 인간의 고귀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걸치고, 값비싼 음식을 차려놓고, 아첨꾼들을 배불리고, 하인들과 자신을 살찌우던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풍겼지만, 내면에서는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의 육체와는 달리 그의 혼은 굶주림으로 죽어갔습니다. 그의 집은 온통 화환으로 장식되었지만, 그 기초는 죄가 가득했습니다. 그의 혼은 포도주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변명할 수 없다!

  부자는 좋은 음식으로 배불리며 화환으로 장식된 술잔을 기울이며 아첨꾼들과 어울렸습니다. 그의 집은 마귀의 사악한 활동 무대나 다름없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늑대처럼 강탈을 일삼고, 자신의 배를 불림으로써 멸망을 재촉합니다. 그들은 지나친 명예와 달콤한 칭찬을 원하는 탓에 재물을 쓸데없이 낭비합니다.
  부자의 주위에 몰려든 아첨꾼들은 실상은 양을 가장한 이리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아첨과 칭찬을 늘어놓아 거만한 마음을 부추기며 그의 상처를 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어 그에게 화가 미치면 그의 친구들은 멀리 도망칩니다. 그들은 얼굴을 감추고 도망치지만, 그를 질책했던 우리는 측은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종종 일어납니다.
  부자는 아첨꾼들은 배불리며 자기 집을 극장처럼 만들고 모두를 포도주에 취하게 하며 연일 연락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부자의 대문에 앉아 몸에 난 상처로 인해 신음하며 음식 부스러기라도 얻어먹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샘물 앞에서 갈증을 느꼈으며, 풍요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그가 어디에 누워 있었습니까? 길가도 아니고, 골목도 아니고, 저잣거리도 아니고 바로 부자의 대문이었습니다.
  부자는 늘 그 앞을 들락거렸기 때문에
“나는 그를 보지 못했소. 그곳을 지나갔지만 눈에 띄지 않았소.”라고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진흙 속의 진주처럼 바로 부자의 대문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보지 못했단 말인가요? 의사가 바로 문 앞에 있는데도 그의 치료를 받지 못했단 말인가요? 아첨꾼들은 배불리 먹였으면서도 가난한 자는 먹이지 않았단 말인가요?
  이것은 먼 과거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과거의 사건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말씀의 부자와 같은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질을 파악하라

  보십시오! 가난한 자가 대문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겉은 가난하지만 내면은 부자입니다. 상처로 뒤덮인 그의 육체는 가시덤불이 뒤덮인 보석상자와 같습니다. 그 안에는 진주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혼이 그처럼 건강한데 몸이 약하다고 해서 그에게 무슨 해(害)가 있겠습니까? 가난한 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절망하지 말고, 부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사악한 행위를 버리십시오. 이 말씀이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를 통해 부와 가난, 잔인함과 견딤, 인내와 탐욕이라는 두 가지를 생생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가 상처를 입고 무시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를 불운아라고 생각하지 말고, 부자가 사치스럽게 꾸민 것을 보거든 그를 행운아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배가 난파된 듯 생각이 흩어져 혼란스럽거든 즉시 항구로 되돌아가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위로를 얻으십시오.
  나사로가 어떻게 멸시를 당했는지, 또 부자가 어떻게 호사스러운 삶을 즐겼는지 생각하고, 실생활에서 그런 일을 목격하더라도 혼란스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만 이해한다면 그 어떤 파도도 우리를 깊이 가라앉게 하지 못합니다. 분별력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배는 결코 침몰되지 않습니다.
  
“나의 육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렇더라도 마음에까지 해(害)가 미치게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아주 사악한데도 부자로 잘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요? “그의 악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무를 평가할 때는 잎을 봐야 할까요, 열매를 봐야 할까요? 당연히 열매를 봐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판단할 때도 겉이 아닌 속을 봐야 합니다. 실제로는 야생 올리브나무지만 겉으로는 잘 재배된 올리브나무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는 늑대인데 인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겉모습이 아니라 인격을 보고,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를 봐야 합니다. 또한 마음의 태도만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살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성질이 거친 사람은 사자와 같으며, 탐욕스러운 사람은 늑대와 같고, 속이는 사람은 뱀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어찌 나에게 사람이 아니라 짐승을 보여주는 것입니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무엇이 인간의 덕성(德性virtue)인지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복종의 미덕

  나사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았습니다. 차라리 개들이 부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핥아주었으니 말입니다. 부자의 대문에 누워있는 나사로는 마치 길가에 떨어진 금화와 같았습니다. 아니, 그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진정 인간사를 관장하십니까? 저 사람은 불의하게 사는데도 부자로 잘살고, 나는 의롭게 사는데도 이처럼 가난해야 한단 말인가요?”라고 말하지만, 나사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에 무조건 복종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혼을 깨끗이 했으며, 모든 고통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의 몸은 누워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앞을 향해 전진했으며, 그의 의지는 날개를 단 듯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는 악한 것을 모두 버리고 상급을 향해 나아갔으며, 좋은 것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첨꾼들은 풍성한 만찬을 즐기는데 나는 부스러기조차 얻어먹지 못하는구나”라고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침내 부자와 나사로가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죽음은 죽음이요, 매장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은 여행, 곧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입니다. 그는 출발선에서 목적지로, 바다에서 항구로, 전쟁터에서 승리의 장소로 나아갔으며, 힘든 경쟁을 뚫고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극장의 비유

  두 사람 모두 모든 것이 사실 그대로 존재하는 장소에 이르렀습니다. 무대는 해체되고 가면은 벗겨졌습니다. 극장의 경우, 낮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많은 배우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옛 이야기와 사건들을 들려줍니다. 어떤 배우는 철학자의 역할을 하고, 어떤 배우는 왕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철학자도 아니고 왕도 아닙니다. 단지 이야기를 위해 왕처럼 꾸몄을 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조각 하나가 박힌 것도 치료하지 못하면서 의사의 복장을 하고 의사인 양 연기하며, 또 어떤 사람은 글조차 읽을 줄 모르면서 교사인 양 연기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그들의 실제 모습과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처럼 꾸미고, 어떤 사람은 수염을 달고 가면을 쓰고는 철학자처럼 꾸밉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기와 갑옷으로 군인처럼 꾸밉니다. 겉으로 드러난 가면은 한갓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배역을 맡은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참 모습인 양 연기를 합니다. 청중이 자리에 앉아 있는 한 가면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연극이 끝나 모두가 자리를 뜨고 나면 배우들은 가면을 벗습니다. 극장에서는 왕이었던 사람이 밖에서는 구리 세공인입니다. 가면을 벗으면 눈속임이 사라지고 진실이 드러납니다. 극장에서 자유인이었던 사람이 밖에서는 노예로 드러납니다. 눈속임은 안에 있고, 진실은 밖에 있습니다. 날이 어둑해져 연극이 끝나면 진실이 드러납니다.
  현 세상과 그 마지막도 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극장이고,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 개개인의 상황은 각자가 맡은 역할입니다. 이 세상이 지나가고 무서운 밤이 이르면(의인에게는 낮이요 죄인에게는 밤이다), 연극이 끝나고 가면이 벗겨지고 각 사람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오직 행위만이 중요할 뿐, 부나 직함이나 권위나 권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왕이든 통치자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아이든지 하나님이 개개인의 삶과 선행에 대해 물으실 때는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평판을 누렸고, 얼마나 가난했고, 얼마나 큰 멸시를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노예였지만 자유인보다 더 고귀하게 살았다면 그 행위(열매)를 나에게 보여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면이 벗겨지면 누가 진정으로 부자이고 가난한지가 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저것 좀 봐요. 저 사람은 연극에서 철학자로 나온 사람 아닌가요? 그런데 이제 보니 구리 세공인이군요. 또 저 사람은 왕으로 나오지 않았나요? 그런데 이제보니 신분이 좀 낮은 사람이군요. 아하, 저 사람 역시도 연극에서는 부자였지만 밖에서 보니 가난한 사람이군요”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도 그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두 가지 가면

  너무 상세히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면 듣는 자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극장의 비유를 들어 두 가지 역할만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줄곧 두 가지 가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가 이 두 가지 가면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그 출발점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현세의 삶을 설명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했던 이유는 현실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보십시오, 두 개의 가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의 가면이고, 다른 하나는 빈자의 가면입니다. 나사로는 빈자의 가면을 썼고, 부자는 부자의 가면을 썼습니다. 가면은 실체가 아니라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부자와 빈자 둘 다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천사들이 나사로를 영접했습니다. 세상에서는 개들이 그를 핥았지만 이제는 천사들이 그를 호위했습니다. 그의 위치도 부자의 대문에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굶주림과 불행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무한정한 풍요와 영원한 위로를 누립니다. 하지만 부자는 풍요롭게 살다가 가난하게 되었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리다가 형벌과 보응을 당했으며, 편안하게 살다가 견딜 수 없는 고뇌에 휩싸였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저세상으로 떠났고 연극은 끝났습니다. 가면은 벗겨지고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둘 다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부자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누가복음 1624)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25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26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커다란 구렁이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고자 하여도 올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누가복음 16:25, 2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을 깊이 상고하면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두려운 말씀이지만 우리의 혼을 깨끗하게 하고, 고뇌를 안겨주지만 우리를 바르게 해줍니다. 경청하십시오. 부자는 고통 속에서 눈을 들어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상황을 목격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너의 집 대문에 있었다. 너는 하루에도 두세 번 그 앞을 지나쳤지만 그를 보지 않았다. 이제 너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멀리서 그를 바라보느냐? 네가 풍요롭게 살고, 네가 자유롭게 그를 볼 수 있었을 때, 너는 한사코 그를 외면했다. 그런 그를 지금은 왜 그리 주시하느냐? 그는 네 대문에 있지 않았느냐? 어떻게 그를 외면할 수 있었단 말이냐? 그가 지척에 있을 때는 보지 않더니 이제 멀리서, 이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 그를 보는 것이냐?”

 가족의 믿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부자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관대함을 조금도 본받으려 하지 않았으면서도 어찌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아브라함도 그를 “아이야(아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갓 관계를 일컫는 명칭에 불과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에 이런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가족 관계가 구원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은 훌륭한 조상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덕스러운 성품입니다.
“내 아버지는 목회자요”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내 아버지는 목사요”라는 말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말도 입 밖에 꺼내지도 마십시오.
  설혹 사도 바울을 아버지로 두고 순교자들을 형제로 두었더라도 그 성품을 본받지 못했다면 가족 관계는 아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가 되고 죄만 더 커질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어머니는 자선가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인이 몰인정하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자기 어머니의 이타주의는 본인의 사악함을 더욱 여실히 드러낼 뿐입니다. 침례인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그러므로 너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하지 말라.』(누가복음 38a)

 진정한 노예

  자랑스러운 조상을 두고 있습니까? 그를 본받을 경우에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본받지 못하면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맺은 겪이니 스스로를 더욱 단죄할 뿐입니다. 의로운 친척을 두었는데도 그의 의로운 성품을 본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행운아가 아닙니다.
  악한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습니까? 그것은 본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다고 해도 그녀를 본받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듯이, 사악한 어머니를 두었다고 해도 그녀와 다르게 살아간다면 아무 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정에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를 본받지 않으면 사후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처럼, 사악한 어머니를 두었는데도 그녀를 본받지 않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듯 잘 살아가면 사후(死後)에 더 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상의 훌륭한 성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덕성(德性
virtue)입니다.
  노예도 고결한 인품을 지닐 수 있고, 주인일지라도 오히려 쇠사슬에 묶인 노예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신분이 고귀한 사람도 정신상태가 노예와 같다면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진정한 노예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죄의 속박은 내면의 성향을 지배하는 데 비해 그 외의 속박은 단지 외적인 상황만을 지배할 뿐입니다. 내면이 속박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노예입니다.
  사실 본래는 아무도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를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지으셨고, 그들은 둘 다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면 노예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인류가 바른 길을 버리고, 욕망의 한계를 뛰어넘어 방탕한 죄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아의 방주

  한때 홍수가 일어나 사람과 동물이 거하는 지역을 모조리 휩쓸었습니다.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깊음의 샘들이 터져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창세기 711). 보이는 것들이 모두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땅은 모두 물속에 잠기었고 어디를 보아도 물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로 세상을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로 변했습니다. 높은 산들도 물속에 잠겼습니다. 보이는 것은 바다와 하늘뿐이었습니다. 인류는 모두 물에 휩쓸렸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물에 잠기지 않고 바다 위를 떠다녔습니다. 그는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 비둘기와 까마귀를 비롯한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그 모든 생명체가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는 홍수가 세상을 뒤덮는 동안 물 위를 떠다녔습니다.
  방주는 창조주 하나님을 선장으로 모신 덕분에 난파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방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홍수가 지면을 깨끗이 쓸어버렸고, 그 결과 악(惡)을 행하던 사람들이 모두 멸망했습니다. 폭풍우가 멈추면서 산봉우리들이 드러났고, 방주는 땅에 안착했습니다. 노아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비입니다. 이 사건은 창자 이루어질 일을 예표합니다. 다시 말해 방주는 교회를, 노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둘기는 성령님을, 올리브나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각각 상징합니다(베드로전서
320 참조). 노아는 온유한 동물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상징하는 예표입니다. 이 사건에 담긴 풍성한 진리를 생각해봅시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주

  홍수가 일어나는 동안 방주가 그 안에 있는 생명체를 보호했듯이, 교회는 길 잃은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방주는 단지 그들의 목숨만을 구했지만, 교회는 그 이상의 구원을 베풉니다. 다시 말해 방주는 이성이 없는 동물들을 안으로 받아들여 그들을 구원했지만, 교회는 이성을 잃은 인간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방주는 까마귀를 받아들여 까마귀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까마귀를 받아들여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다시말해 교회는 늑대를 받아들여 양을 내보냅니다. 탐욕스러운 마음이 변화되어 늑대에서 양으로 탈바꿈합니다. 늑대는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하지만 양은 심지어 털까지 모두 내어줍니다.
  방주가 땅에 멈추자 문들이 모두 열리고 노아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땅이 황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진흙으로 뒤덮인 거대한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 밑에는 사람을 비롯해 이성이 없는 짐승들까지 모두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러한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땅은 깊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노아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것들은 인간도 동물도 모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하늘만 보였습니다. 그는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깊은 고뇌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는 절망감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습니다. 노인이 포도주를 마시고 잠에 곯아떨어질 때처럼 그도 일어난 일을 모두 잊기 위해 포도주를 마신 뒤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노아를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술에 취한 것은 헛된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주고, 술은 마음에 근심하는 자들에게 줄지어다』(잠언 31:6)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내나 자녀를 잃고 장례식을 치를 때나 슬픈 감정이 북받칠 때나 절망감이 엄습할 때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놓고 술을 마시며 애써 나쁜 기억을 없애려고 하는 경우를 이따금 목격합니다. 사람들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이유는 그의 고통을 달래주기 위해서입니다. 노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망감에 짓눌린 그는 포도주를 치료약으로 사용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뒤 취기가 돌자 그는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노예제도의 기원

  노예제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려면 그 후에 전개된 사건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아의 저주받은 아들(함)이 그의 장막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노아의 혈통이었지만 그의 성품을 본받지 않았습니다(거듭 말하지만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고 해서 저절로 고결한 성품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고결한 성품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는 장막 안에서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보았습니다(창세가
922). 그는 마땅히 옷을 입혀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 그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겉옷을 취해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뒤로 하고 걸어가 그의 몸을 가려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노아는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카나안은 저주를 받으리니, 그가 그의 형제들에게 종들의 종이 될지어다.”...』(창세기 925)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너는 네 아비의 수치를 널리 드러낸 탓에 장차 노예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노예제도가 죄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 곧 사악한 행위가 노예제도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겠습니까?
  그러면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탈주 노예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바울을 만나게 되어 침례를 받고 죄를 뉘우친 후 그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10 내가 갇힌 중에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청하노니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너와 나에게 유익하므로 12 내가 그를 다시 보내노니 그러므로 너는 그를 받아들이라. 그는 내 마음 같은 자라. 13 내가 그를 나와 함께 있게 하여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나를 네 대신 섬기게 하고 싶었으나 14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그가 잠시 떠나 있게 된 것은 아마 이로 인하여 네가 그를 영원히 얻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니 16 이제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의 사랑하는 형제로서 내게 특별히 그러한데, 하물며 너에게는 육신과 안에서 더욱 그러하지 않겠느냐?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여긴다면 그를 나와 같이 영접하라. 』(빌레몬서 1017)

  오네시모의 성품이 고결해졌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자유의 여부가 ‘성품’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겠습니까? 속박과 자유는 단지 이름에 불과합니다. 무엇이 노예입니까? 그것은 한갓 명칭일 뿐입니다. 술에 취해 잠자리에 드는 주인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와는 달리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노예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를 노예라고 불러야 할까요?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입니까, 술 취한 사람입니까? 누가 진정한 노예입니까? 사람의 노예입니까, 정욕의 노예입니까? 사람의 노예는 겉으로만 노예이고, 정욕의 노예는 내면이 속박된 노예입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사물의 본질을 옳게 파악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눈속임에 현혹되지 않고 누가 참된 노예인지, 누가 진정으로 가련하고 천박한 사람인지, 누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지, 정욕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분별하는 법을 터득한다면 어떤 혼란에도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라진 그림자

  주제에서 좀 많이 벗어난 듯합니다. 이제 다시 본래의 주제로 되돌아가봅시다. 본문의 부자는 본래는 부유했지만 지금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사실 그는 과거에 부자로 지낼 때도 더없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한 사람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재물은 얻었으되 덕성(德性virtue)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다른 사람의 재물을 소유하고 정작 자신의 재물은 잃고 말았던가요? 속사람(魂
自我soul)이 풍요롭지 못한데 “나는 소출이 풍성한 땅을 가지고 있소이다”라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덕성(德性virtue)을 갖추고 있지 않은데 “나는 노예들과 집사와 가정부들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소이다”라고 말한들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경건하지 못한데 “나는 좋은 옷을 가지고 있소이다”라고 말한들 달라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물은 소유하고 있으되, 정작 자신의 재물은 소유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누군가가 맡긴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잠시 맡아 보관하는 위탁금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돈입니다. 따라서 그 돈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한다면 큰 형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바라보며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누가복음 1624)라고 애원했습니다. 이는 빈털터리 거지가 하는 말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나사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가 생전에 수천 번이나 그 옆을 지나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나사로를 보내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나사로를 보내시어...”(24절), 이것이 부자의 요청이었습니다.

“술시중을 들던 하인들은 모두 어디 간 것이냐? 호화로운 양탄자는 어디에 있느냐? 아첨꾼들은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느냐? 그 모든 사치와 허영, 거만한 태도, 깊이 감추어둔 황금, 좀이 갉아먹던 겉옷, 그토록 귀하게 생각했던 은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느냐? 사치와 방탕을 일삼던 삶은 모두 어디 갔느냐?”

  그것들은 한갓 잎사귀에 불과했습니다. 겨울이 닥치니 모두 시들어 말라버렸습니다. 그것은 한 여름밤의 꿈이었습니다. 날이 밝으니 모두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였습니다. 실체가 드러나니 그림자는 없어졌습니다.

 물 한 방울!

  부자는 아브라함을 향해 나사로를 보내시어...”(24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외에 다른 의인(義人)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노아나 야곱이나 이삭은 보이지 않고 아브라함만 보였을까요?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관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행자들을 자기 천막으로 영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관대함은 부자의 몰인정함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사로를 보내시어...”(24절)라는 부자의 말을 기억하고 우리도 가난한 자들을 무심코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봅시다. 만일 그렇다면 장차 그들이 나사로처럼 우리를 단죄할 것입니다. 부자는...‘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누가복음 1624)라고 호소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재는 그 자로 너희도 다시 측정을 받으리라.』(마태복음 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 부스러기를 나눠주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물 한 방울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시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내 혀를 식히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라는 부자의 호소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누가복음 16:25)

『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누가복음 16:25)

But Abraham said, Son, remember that thou in thy lifetime receivedst thy good things, and likewise Lazarus evil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and thou art tormented. (Luke 16:25)

 공과에 따라 주어지는 보응과 상급

  아브라함은 단지 “네가 받았다”(엘라베스)라고 하지 않고, “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아펠라베스)라고 대답했습니다. 접두어 하나로 의미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전에도 자주 말했지만 음절 하나도 주의 깊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상고하라”(요한복음 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이나 획 하나에도 의미가 달라집니다(마태복음 518).
  문자 하나를 덧붙이면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려면 족장 아브라함(헬라어
ː아브라암Abraamab-rah-am')의 이름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아브람’(Abram)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네 이름을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부르지 않고, 네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하리니...Neither shall thy name any more be called Abram, but thy name shall be Abraham; ...(창세기 175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모음 하나가 덧붙여졌을 뿐인데 그 의미가 “많은 민족들의 아비”(a father of many nations)가 되었습니다. 모음 하나를 덧붙인 것으로 그는 더없이 고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은 변화를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빚진 것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십시오. ‘받은 것’‘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은 그 의미가 크게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형벌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고, 세상에서 호사롭게 잘 살았던 사람은 내세에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주의해서 잘 들어보십시오.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다”라는 말은 응당 받아야 할 빚을 의미합니다. 이제 핵심에 거의 다다랐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서론에 현혹되지 말고, 마지막 결론을 기다리십시오.
  저는 예리한 안목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단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경의 깊은 진리를 맛볼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비유하자면 거친 폭풍우가 불지 않는, 그 어떤 잔잔한 바다보다 더 안전한 곳으로 모두를 인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갈수록 더욱더 안전해질 것입니다. 그곳에 이르면 제멋대로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혼란함은 모두 사라지고, 개념들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아이야, 너는 네 생전에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나쁜 것을 받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나 이제 그는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25절)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무엇인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빚진 것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로는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면류관을 쓴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상급이요 위로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내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사악하고 몰인정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사치와 술 취함으로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방탕을 일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그에게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라고 말했을까요? 방탕하고 몰인정한 그에게 무슨 빚을 진 것일까요? 무엇이 그에게 진 빚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왜 “너는 받았다”라고 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라고 말했을까요?
  제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빚진 것은 보응이었습니다. 그가 받아야 할 빚은 바로 형벌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너는 받았다”가 아니라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라고 말한 뒤에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다”라고 말한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요? 깊이 생각을 해 보십시오. 바야흐로 깊은 진리가 드러날 순간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의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죄인이고 나머지는 의인입니다. 또 의인들 가운데도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의로운 사람이 있고, 그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고결한 사람이 있고, 또 그보다 더 고결한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별과 태양과 달이 있듯이 의인(義人)들도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는 해의 영광이요 또 하나는 달의 영광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별들의 영광이니 이는 영광에 있어서 한 별이 다른 별과 다르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15:41)라고 말했습니다. 영광이 더 큰 것이 있고 더 작은 것이 있습니다. 하늘의 천체들이 서로 차이가 있듯이 땅의 생명체들도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사슴도 있고, 개도 있고, 사자도 있고, 뱀도 있고, 그밖에 많은 짐승이 있습니다. 죄도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들 가운데 일부는 의인이고 나머지는 죄인입니다. 또한 의인들과 죄인들도 제각기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경청하십시오! 누군가가 의롭다면, 즉 다른 사람들보다 수천 배나 더 의로워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더라도, 그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죄에서 아무리 자유로워 다른 사람들보다 만 배나 더 의롭다해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입니다. 솔로몬은
『“나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도다. 나는 내 죄에서 정결케 되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잠언 20:9)라고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태복음 6:12)라는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기도를 드림으로써 사후에 형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 택하신 그릇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입이요 성령님의 하프(열 줄 악기)요 세상의 스승이었던 사도 바울, 곧 땅과 바다를 두루 누비면서 죄의 가시를 제거하고 경건의 씨앗을 뿌리고, 왕들보다 더 힘있고, 부자들보다 더 부유하고, 군인보다 더 강하고, 철학자보다 더 지혜롭고, 웅변가보다 더 유창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되 모든 것을 소유하고, 그림자만으로도 죽음을 쫓아내고, 옷자락만으로 질병을 물리치고, 바다에서 승리를 거두고, 셋째 하늘에 이르러 낙원을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선포했던 그조차도『내가 자책할 것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이것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고린도전서 44a)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업적과 덕스러운 성품을 이루었던 그도『그러나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시니라』(고린도전서 44b)라고 고백했습니다.
  과연 누가 청결한 마음을 소유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죄에서 깨끗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불가능합니다. 무슨 말들을 하고 있습니까? 누구를 의롭다고 말합니까? 기부금을 바치고, 가난한 자를 사랑한다고 자랑할 셈입니까?
  흠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선한 사람도 성질이 격하거나 허풍을 떠는 등 여러 가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죄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은 자제력을 잃을 수 있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은 선뜻 기부금을 바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덕스러움으로 유명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덕스러움으로 유명합니다.
  온갖 좋은 성품을 두루 갖춘 의인일지라도 그 의로움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그의 의로움은 교만으로 인해 빛을 잃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의인들이지 않았던가요?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누가복음 1811b)라고 자랑했습니다. 청결한 양심의 소유자가 교만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를 해롭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거만함입니다. 인간이 모든 죄에서 온전히 깨끗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악인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선한 구석이 하나도 없고 온통 악하기만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절도, 사기, 폭행 등을 저지르면서도 이따금 기부금을 바치고, 자제력을 발휘하고, 친절한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애통해하기도 합니다. 죄가 전혀 없는 의인이 없듯이 선한 구석이 전혀 없는 죄인도 없습니다.
  아합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른 죄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했습니다(열왕기상
2119). 하지만 그가 죄를 슬퍼하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졌는지, 보느냐?...』(열왕기상 2129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구석이 조금도 없는 죄인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돈 몇 푼에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 이스카리옷 유다보다 더 악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는 나중에『...“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한 죄를 지었다.”...』(마태복음 274)라고 고백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덕성(德性
virtue)을 전혀 추구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양은 온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야생 짐승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늑대는 본성이 거칠기 때문에 길들일 수 없습니다. 동물의 본성은 해체되거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인간(male & female)의 경우는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원할 때 거칠어지기도 하고 유순해지기도 합니다. 인간은 본성에 속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공평한 보상과 보응

  앞서 말한 대로 결함이 전혀 없이 선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선한 구석이 조금도 없이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는 보상이나 보응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악하고 탐욕스러운 살인자도 선한 일을 행한다면 그 선행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그가 저지른 악 때문에 선행에 대한 보상이 상쇄되지는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수천 가지 선을 행한 사람도 그릇되게 행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에 대한 징벌을 받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도 없고,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도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기 바랍니다. 제기 이 말을 거듭 되풀이하는 이유는 모두의 마음에 확고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혼을 공격해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제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따라서 저는 저의 말을 마음속 깊이 심어주고 싶습니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면 밖에 돌아다닐 때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금화를 지갑에 넣고 단단히 동여매 도둑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이 진리를 마음에 깊이 간직하십시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진리를 가르쳐 모두의 마음에 확고히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나태함으로 인해 이 진리를 망각하는 일을 방지하고 새롭게 각성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을 안정되게 만들어 모든 혼란을 내쫓는 것이 저의 목적입니다. 저의 말을 무익한 수다로 여기지 마십시오. 저의 말에는 선생으로서의 관심과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저는 저의 말이 쉽게 잊혀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되풀이하는 일이 하나도 귀찮지 않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뿐입니다.
  죄가 하나도 없는 의인도 없고 선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죄인도 없습니다. 의인과 죄인 모두에게 그에 따른 보상이 있습니다. 죄인은 아무리 작은 선행을 실천했더라도 그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받습니다. 의인은 아무리 작은 죄를 저질렀더라도 그에 마땅한 징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이고,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일을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내세 사이에 죄의 경계선을 두셨습니다. 대체로 의롭지만 사소한 허물이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고난과 징벌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차분히 생각하십시오. 의인이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면 세상에서 그에 마땅한 징벌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내세에서 징벌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죄인은 강탈과 사기를 비롯해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지만 현세에서 그가 행한 작은 선행을 보상받아 걱정근심 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차 내세에서는 더 이상 그런 보상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한다면 그는 현세에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저세상으로 떠날 때는 보상이 기대됩니다. 하지만 사악하기 그지없는 죄인이 탐욕에 사로잡혀 수많은 악을 저지르는데도 아무 탈 없이 번영을 누리는 경우에는 내세에서 전혀 행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사로도 세상에 사는 동안 한두 가지 죄를 저질렀을 테고, 부자도 한두 가지 선행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더는 아무것도 구하지 말거라. 너는 세상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다”라고 말했던 이유입니다. 이는 결코 빈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뭐라고? 네가 선을 행했다고? 이미 재물과 건강과 사치와 권력과 권위를 보상으로 다 받아 누린 상태가 아니더냐 네게 빚진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너는 당연히 받아야 할 좋은 것을 다 받아 누린 상태이다. 그러면 나사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가? 아니다. 나사로 역시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을 받았다. 네가 좋은 것을 받아 누리는 동안 나사로는 고난을 당했다. 그 때문에 그는 지금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의인이 세상에서 징벌을 당하는 것을 보거든 그를 행운아로 생각하고,
“저 의인은 죄를 지은 탓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고 있거나, 아니면 지은 죄보다 더한 징벌을 받아 그 고난을 의(義)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십시오. 사후에 정확한 회계(會計)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네가 나를 위해 이만큼 고난을 당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0달란트를 맡긴 사람에게서 10달란트의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10달란트를 받고서도 60달란트에 해당하는 희생을 감수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네 죗값으로 10달란트의 희생을 치르면 되는데 60달란트의 희생을 치렀으니 나머지 50달란트는 네 의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머지가 의인의 의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면 욥을 생각하면 됩니다. 욥은 악은 그 모양도 흉내내지 않았던 경건하고 흠 없고 충실한 의인이었습니다(욥기
11). 그의 육체가 세상에서 혹독한 고난을 당한 이유는 그가 내세의 상급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은『네가 나의 심판을 무효화시키려느냐? 네가 나를 정죄함으로써 네가 의롭게 되려느냐?』(욥기 40: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의인(義人)들처럼 선(善)을 추구하며 끝까지 견디고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 준비된 모든 좋은 것들, 곧 의인에게 합당한 축복을 받아 누리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런 결과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과 권세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원무궁토록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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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크리소스톰/『 부자와 나사로ː제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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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 112:110
1 너희는 를 찬양하라. 를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크게 기뻐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2 그의 씨가 지상에서 강성할 것이요, 정직한 자의 세대가 복을 받을 것이라. 3 부와 재산이 그의 집에 있을 것이며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는도다. 4 정직한 자에게는 암흑 속에서 빛이 일어나니 그는 은혜로우며 긍휼이 충만하고 의롭도다. 5 선한 사람은 호의를 베풀고 빌려 주나니 그가 자기의 일들을 분별력 있게 이끌리라. 6 진실로 그가 영원히 요동치 아니하리니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 그가 나쁜 소식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를 신뢰함으로 그의 마음이 확정되었도다. 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마침내 그는 그의 원수들 위에 임하는 그의 열망을 보리라. 9 그가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며 그의 뿔은 명예로 높여지리라. 10 악인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이를 갈고 녹아지리니 악인의 욕망은 패망하리로다.

(시 편 39:6잠 언 23:527:2413:2211:28

15:1618:1122:1

39:6 진실로 사람마다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다니며 진실로 그들이 헛되이 분주하니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가질지 알지 못하나이다. 23:5 네 눈을 허무한 것에 주목하려느냐? 재물은 반드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향하여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27:24 재물이 영원토록 있지 못하니, 왕관이 대대로 이어지겠느냐? 13:22 선한 사람은 자자손손에게 유업을 남겨도, 죄인의 재산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11:28 자기의 재물을 신뢰하는 자는 넘어질 것이나, 의로운 자는 가지처럼 번성하리라. 15:16 소유가 적어도 를 두려워하는 것이 큰 재물로 인하여 고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8:11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읍이며 자기 생각에 높은 성벽 같으니라. 22:1 선한 이름을 택하는 것이 많은 재물을 택하는 것보다 낫고, 은총을 사랑하는 것이 은과 금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 이제 내가 무엇을 기다리겠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And now, Lord, what wait I for? my hope is in thee.
(시 편 39:7

Originally published under the title of
RICH MAN AND LAZRUS
by
John Chrysostom

Korean Translation Copylight ⓒ 2009
Kyujang Publishing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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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ː참된 부와 가난은 그 열매로 판단한다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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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

 

 

금빛 찬란한 아침에∼♪∼♬

1. 금빛 찬란한 아침에 주님 다시 오실 때,
      주의 영광 내가 친히 보겠네--♪
      온 세상에 흩어 있는 주의 백성 모을 때
      그때 나도 거기 들림 받-겠네∼

2. 주안에서 잠든 성도 주의 음성 듣고서,
      무덤 모두 깨고 일어나겠네--
      주와 같은 몸을 입고 공중에서 주 뵐때,
      그때 기쁨 형용할 수 있-으랴∼♩

3. 나의 눈이 빛난 하늘문을 바라볼 때에,
      그 안에서 생명 강물 흐르리--♬
      우리 앞서 세상 떠난 형제 자매 만날 때,
      두 손 벌려 영접함을 받-겠네∼

4. 심판주가 오실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주가 약속하신 그날 보리라--
      순식간에 우리 몸이 변화 함을 받고서,
      주와 같이 영원토록 살-겠네∼♪

      【후 렴】
      주의 백∼성 모으실∼때,
      구속 받은 주의 자녀 크신 사랑 속에서∼
      주의 백∼성 모으실∼때--,
      영원토록 하늘에서 살겠네∼♩♬∼♪(x2)

 

큰 죄에 빠진 나를∼♪∼♬

1. 큰 죄∼에 빠진 나를 주 예∼수 건지사∼♪
      그 넓∼은 품에 다시 품-으∼신 은혜는∼
      저-바∼다 보다 깊고 저 하∼늘보다 높다∼
      그-사∼랑 영원토록 나 찬∼송 하리라∼

2. 옛날∼에 유대 땅에 주 예∼수 다닐 때∼
      그 은∼혜 받으려고 큰-무∼리 모였네∼♩
      눈-먼∼자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셨으니∼
      나-같∼은 죄인까지 그 은∼혜 받도다∼

3. 주 크∼신 사랑으로 만 백∼성 위하여∼
      그 십∼자가의 고난 다-받∼으셨으니∼
      그-속∼죄 받은 성도 큰 소∼리 함께 높여∼♬
      온-천∼지 울리도록 주 찬∼송 하리라∼

      【후 렴】
      날로 더욱 귀하다- 날로 더욱 귀하다∼
      한이 없이 넓은 우리 주의 사랑∼
      날로 더욱 귀-하-다∼♩♬∼♪

┃Amazing Grace∼♪∼♬  (04:03)┃
[0403]

(445) 훗날 우리 다시 만나 (choir)

〔 시편 99:9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거룩한 산에서 경배하라.
이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라.

romans8_19

(로마서 8:19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시편 10743┃로마서 152┃고린도전서 10241622
데살로니가전서 43a┃디모데전서 45┃마태복음 63377
역대기상 1611

『 43 누구든지 지혜로운 자들과 이 일들을 살펴볼 자들, 그들은 의 자애하심을 깨달으리로다. 2 우리 가운데 각 사람은 선을 위하여 자기 이웃을 기쁘게 세워주자. 24 누구나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각자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 22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우리 께서 오실 때 저주를 받을지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5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써 거룩하게 됨이라. 33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 7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 11와 그의 능력을 찾고 그의 얼굴을 항상 찾으라. 』

For the kingdom is the LORD'S
and he is the governor among the nations.

이는 왕국이 의 것이요,
주께서 민족들 가운데 통치자시기 때문이니이다.

Psalms 22:28시편 22:28

『 14:24 만군의 주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것을 행하리니 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이사야 14:24┃아모스 4:12)

┃I Need Thee Every Hour given  (02:05)┃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