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6. 00:10

“ 진짜 남자란? ” (양육/성장)

(양육/성장) [20070712] ● No_More_Excuses_(Chap_9)

 글자크기를 조정하는 방법ː[Ctrl]를 누르고, [마우스 휠] 또는 [╋/━]

● 진짜 남자란?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

  남자들이여! 우리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남성다움’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 많은 남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야만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상대방이 내민 펀치에 뒷걸음질치며, 남성다움이라는 문제에 관해 죽은 척하려 해왔다.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는 하나님께서 남성들에게 부여하신 리더십 역할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주는 변명거리가 되어버렸다.
  어떤 식으로 보든 남성다움은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위기는 당신이 보고 듣는 것과 거의 관련이 없다. 이 남성다움의 위기는 신학적인 위기이다.

    남성다움의 의미에 대한 오해

  내가 신학적 위기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별이라는 주제에 관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오해해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남성다움의 의미를 오해해왔다. 하나님께서 성별에 어떠한 뜻을 담아 두셨는지 오해해온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한 오해해왔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된 시각에 따라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려 하다가 그것이 효과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기초적인 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즉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고린도전서 11:3). 바울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휘 계통, 즉 위계질서에 따라 기능하도록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아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불평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독생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이것은 기능과 피조물 관리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상에 계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음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434 참조). 주 예수님은 한 번도 스스로 결정을 내리시거나 계획을 세우시지 않으셨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결코 나가신 적이 없다.
  그런데 바울이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라고 말했을 때, 이는 ‘그리스도인 남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가 교회 앞으로 글을 쓰고 있었기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안다. 믿지 않는 세계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관하심 아래 있지 않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남자에게로 흐른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불순종했다면 구원의 계획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있는 우리도 주님께 불순종했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13)에서『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라고 말한다. 이것을 나는 하나님의 언약 계통이라 부른다. 즉 권위가 피조물 가운데 이런 식으로 흘러야 한다는 말이다. 창조의 순서는 신성한 권위 계통을 확립했다.
  하지만 연쇄 편지의 개념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연쇄 편지는 당신이 편지의 연속성을 깨뜨리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늘 동반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연속성을 깨뜨리면 그분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 대다수는 하나님의 연속성을 이미 많이 깨뜨렸던 경험이 있다. 우리 남자들은 전반적으로
‘영적 리더십’‘부부 리더’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거나 넘겨줌으로서 이렇게 소극적으로 행동해왔다. 한 세대의 여자들은 남성 고유의 역할을 공격적으로 빼앗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문화, 그리고 때로는 교회조차 하나님의 언약 계통을 깨뜨리는데 기여해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날 남자들은
‘성경적 남성 리더십’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몸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소년들은 대부분 여자들에게 압도되는 체계 속에 있다. 교회에서도 설교 단상은 남자들로 가득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은 흔히 여성이 이끌고 있다. 소년들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거의 여자다.
  이 모든 것은 집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리더십 역할을 포기한
‘무기력한 남자들’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께서 집안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사용하시는 모든 경건하고 유능한 여성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이런 재능 있고, 헌신적인 여성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런 남녀 간의 역할 전환은 여성의 역할을 옹호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여성 해방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더 공격적인 성향의 페미니스트는 마음에 드는 남성 리더십을 찾을 수 없어서 좌절감에 빠진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여자들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만약 여자가 올바른 사랑과 관심과 인도를 받고 있었다면 그것에서 해방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대다수의 남자들을 샛길로 빠지게 하는 데 성공했으며, 우리 대부분의 에너지와 관심을 우리 남성다움을 강화시키고, 그 권리를 주장하도록 해준 직업과 같은 다른 분야에 쏟아 붓도록 속여 왔다.
  우리 남성이 이런 다른 영역에 자신을 쏟아 부은 나머지 집과 교회,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거룩한 리더 역할을 주장하고 실천할 에너지와 주의력을 거의 다 써버리게 됐다. 그 결과는 특히 우리를 따르도록 양육해야 하는 세대들 사이에서 “
난장판이 된 문화”이다.
  때때로 오늘날의 아이들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 자녀들 중에서도, 특히 아들들이 잃어버린 세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성경적인 남성상을 본으로 보여주고, 그 기준에 따라 살 책임을 묻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남성다움에 관한 세상적인 정의

  지난 몇 년 동안 남성다움의 정의가 크게 변환했다. 새로운 남성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으며,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혼자의 힘으로 피의 복수를 하는 람보형 슈퍼맨이다. 그의 임무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원수를 죽이고, 그러는 동안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소년들과 청년들의 세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이들은 폭력을 쉽게 행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섭다. 그런데 더 두려운 점은 그들이 폭력을 가하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는 정상적인 인간의 동정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 폭력적인 아이들은 ‘폭력의 문화’ 속에서 키워졌다.
  이 아이들은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우선순위를 다시 정의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그리고 동료들의 압력의 공세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그 부정적인 정보를 무효로 만들
‘건강한 남성상’의 영향력에 압도당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그래서 이 소년들은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모른 채 자라났다.
  또한 성경적 남성다움의 결핍으로 어린 소녀들이 받는 영향도 그만큼 파괴적이 됐다. 즉 우리는 올바른 남성상을 충분히 보지 못했기에 좋은 남자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모르는 소녀들의 세대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장애가 있는 자녀 집단이 둘이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소년들과 소녀들이 결혼을 하거나 혼전에 아이들을 생산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들은 필요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할 아이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대를 만들게 된다. 이들의 아버지 노릇을 하는 미숙한 남자는 책임을 지는 데 관심이 없고, 이들을 임신한 젊은 여자들은 그들을 제대로 양육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와 사회 전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시스템을 영속시켰다는 것이
다.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19081973) 대통령이 60년대 초반에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을 제정한 이래 특히 부양 자녀를 둔 가족의 문제를 역점을 두어 다루기 위하여 5조 달러를 써왔다.
  우리 대다수가 이 사회 프로그램이 완전한 실패작이었다는데 동감하리라 생각한다. 비록 프로그램이 의도는 좋았으나 핵심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된
‘가치관’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가족 단위를 창조하신 이유 중의 하나는 그분이 우리에게 가치관을 영속시키고, 전수할 체계를 주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우리 가치관을 항상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치관에 반항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반항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가치관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은 부모의 가치관에 반항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가치관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 체계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났다면 그 가치관에 반항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더라도 어머니가 당신의 귀에 가치관을 속삭이는 것을 극복해야 했다. 그 영향력이 몸에 늘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잠언 226)을 인용하기 좋아한다.『아이를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훈육하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지만 이 구절은 성경적인 정보가 아이들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젊은이를 소생시키기 위하여 언제든지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우리 자녀들과 국가의 장래가 남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이 과정에 여자가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결정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남자들이 앞장서서 실패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문제를 스스로 책임진다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제안하는 것뿐이다.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진짜 남자란 무엇인지에 대한 적절한 관점, 즉 신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의 세대이다.
  우리 삶을 통제할 신학적인 관점이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인 타락이 큰 재앙의 단계까지 도달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는 그 문제를 감추기 위하여 정부 자금을 투자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정부는 이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너무나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었기에 거기에 투자할 돈이 더 이상 없다.
  
이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이 책임은 주로 오늘날 “남자들”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개인적 문제든 가족 문제든 교회 문제든 지역 사회 문제든 우리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고, 그에 알맞은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의 진짜 남자에 대한 정의

  성경은 “진짜 남자”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나님은 진짜 남자를 어떻게 정의 내리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남성다움을 어떻게 정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진짜 남자의 그림을 그려준다면 그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일주일에 5일씩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여 근육이 불룩 튀어나온 모습이겠는가? 우리 대다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불룩 튀어나온 것은 근육이 아닌 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짜 남자는 여자들을 임신시킬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우리 집 개도 그렇게 산다. 진짜 남자는 아내의 뺨을 치고, 누가 집안의 우두머리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변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진짜 남자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남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그런 남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남자를 빨리 찾는 편이 좋을 것이다. 특히 소수 집단이 이끄는 교회에서 점점 더 커지는 문제가 또 하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여자들이 만날만한 영적 특성을 가진 남자가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는 교회에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생긴다. 그리고 나아가 집안에 리더가 없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당신이 엉망인 가족을 이끄는 엉망인 남자인데 당신의 가족이 교회에 나간다면 그들은 엉망인 교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엉망인 가족을 이끄는 엉망인 남자가 된다. 그래서 당신은 엉망인 교회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신의 교회가 마을의 빛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엉망인 마을에 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엉망인 가족을 이끄는 엉망인 남자이고, 그 가족이 엉망인 교회라는 결과를 가져오며, 엉망인 마을을 만든다. 그런데 당신의 마을이 도시 속에 있다면 당신은 엉망인 도시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당신이 엉망인 도시의 원인이 되는 엉망인 마을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엉망인 교회를 만드는 엉망인 가족의 원인이 되는 엉망인 남자이다.
  따라서 더 좋은 가족이 다니는 더 좋은 교회에 영향을 받는 더 좋은 마을로 구성된 더 좋은 도시로 이루어진 더 좋은 나라로 가득한 더 좋은 세상을 원한다면
“더 좋은 남자의 세대”가 되기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그러면 진짜 남자를 이루는 하나님의 형상과 정의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욥기 29)은 내가 진짜 남자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진짜 남자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이다. 그는 이런 고난을 당하는 가장이었다.
  욥의 이야기를 전부 다시 살펴보지는 않겠다. 당신은 이미 그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거나 스스로 시간을 내서 읽어볼 수 있다. 욥기서의 앞 부분은 그의 믿을 수 없는 고난을 상세하게 다룬다. 욥은 고난을 받고 있었지만 상황이 그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욥은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스스로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의미에서 투덜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기 위해 온 세 남자와 욥의 대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29장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진짜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다섯 가지 특성 또는 성질을 찾게 된다.

(1) 진짜 남자는 영적 유산을 만들고 전수한다.

  첫번째로 진짜 남자는 영적 유산을 남겨둘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남자는 영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자신의 삶 속에서 영적 기반을 계발하고 발전시킨다. (욥기 2915)을 살펴보자.

1 또 욥이 계속 그의 비유로 말하기를 2 “오, 내가 지난 달들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존하시던 날들과 같이 되었으면! 3 그때는 그의 촛불이 내 머리 위에 비쳤고 그의 빛으로 내가 어두움 속을 헤쳐 걸었으니 4 내 젊은 시절이라. 그때는 하나님의 비밀이 내 장막 위에 있었도다. 5 그때는 전능하신 분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내 자식들이 내 주위에 있었도다. 』

  욥이 그의 ‘전성기’였던 지난 세월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되짚어 보았는지 주목해보라. 어떤 남자가 그의 기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욥은 그의 믿음이 과거의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욥은 우리 대다수가 결코 알지 못하는 고난과 상실감을 겪고 있었으며, 더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난 세월 길을 밝혀주셨기에 욥에게는 그의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렸어도 그 고난을 인내할 수 있도록 하는 과거와 유산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었다.
  욥은 자녀들이 살아 있었을 때 그들과 같이 영적 순례 여행을 했다는 점을 또한 주목하라. 비록 그들이 지금 죽었지만 욥의 자녀들은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었다. 오늘날 아이들이 방향을 잃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들이 그들에게 매달릴 수 있는 유산을 남겨두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한 과거가 없고 당신의 인생에서 은혜의 발자취를 볼 수 없다면 삶의 일부가 빠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거에 그 어떤 일도 행하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내일까지 견딜 수 있도록 매달릴 수 있는 것을 오늘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녀들에게 전수해 줄 영적 유산도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곳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곳에 기념 비석을 세웠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 돌들이 무슨 뜻이니이까?』(여호수아 46b)라고 물어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
  여기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질문을 하겠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겠다. 우리 아들이나 딸이
“아빠, 하나님이 아빠의 삶 속에 정말로 특별한 일을 하신 적이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는가? 길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이 길을 만들어주셨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 조부모와 증조부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양식이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
음식”이 되어주셨는지, 의사가 없을 때 그분이 어떻게 그들의 “치료자”가 되어주셨는지를 들려줄 수 있다. 그런 영적 유산이 없고, 막다른 길목에 다다랐다면 당신은 포기하기가 쉽다.
  그런데 당신에게 유산이 있는데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면 포기하기 전에 두 번 다시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거에 역사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이 욥과 같은 곤경에 처하고 당신의 세계가 무너져 내릴 때, 오늘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 안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된다.
  최근에 댈러스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어렸을 적에 부모가 교회에 나가라고 했던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냐고 물어보았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유산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다음 세대에는 이것이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부모들도 영적 유산이 없기 때문에 자녀들이 그런 유산을 갖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문제는
‘뇌’(腦)가 중립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석처럼 자기가 접할 수 있는 것에 끌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거룩한 유산을 남겨주지 않고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세대’에게서 사고방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뇌’‘마음’영적 실체(spiritual reality)와 접촉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양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들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려주는 도덕적 나침반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아이들은 악을 행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이 여러 명 모이면 우리는 그 집단을
‘갱단’이란 부른다. 이런 아이들에게 갱단은 대안 가족이다. 갱단이 늘어나고, 아이들이 점점 더 어린 나이에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더 이상 아픔이나 양심의 가책이, 후회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런 아이들은 위험천만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필연적인 결과에 관심이 없기에 대단히 위험하다.
  내가 자라날 때는 반드시 오는 결과에 신경을 썼다. 우리 아버지가 그 부분에서 나를 질리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가 잘못을 하면 몇 시간 동안이고
‘설교’를 하셨다. 개리슨 중학교에서 싸운 것 때문에 정학을 받았던 때가 생각난다. 학교 식당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나도 거기에 가담했었다. 내가 이겼는지 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있기는 했다. 그래서 정학을 당했다.
  교장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싸우다가 정학을 당했기 때문에 나를 데리러 와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부두에 있는 직장에서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가 거기에 계실 때만 돈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를 집에 바래다주기 위해 학교로 오셨을 때 돈을 못 버셨다. 그분의 말씀대로
‘학교에서 멍청이와 싸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께 하셨던 말씀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보시고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토니가 다시 정학을 받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라고 덧붙이셨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은 내 평생에 가장 길게 느껴졌던 귀가 여행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제 네 방으로 올라가거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분은 즉시 올라오지 않으셨다. 30분 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으셨다. 한 시간이 흘렀다. 두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올라오지 않으셨다. 그분이 무엇을 하시고 계셨는지 아는가? 정신적인 고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도록 만들고 계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천천히 올라오시면서 그 낡은 볼티모어 집의 계단이 하나씩 하나씩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손에는 올드 페이스풀이 들려 있었다. 올드 페이스풀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겠다. 올드 페이스풀은 이발사가 면도날을 다듬는 가죽 띠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 벨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두꺼운 가죽 띠를 쓰셨다.
  그분은 방에 들어오시더니 침대 옆에 앉으셔서
“또 학교에서 싸울거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니오. 안 그럴게요. 절대로 안 그럴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알겠다.” 그런 다음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체벌을 가하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다시 물어보는데, 또 학교에서 정학을 당할 거냐?”
  나는 대답했다.
“아빠, ‘아니오!’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고서는 다시 올드 페이스풀로 채찍질 당했다. 형제여, 나는 이웃을 깨울 정도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잘 안 들린다. 또 정학을 당할 거냐?”
  나는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아니오! 아빠! 절대로 안 그럴게요! 예수님께 맹세해요! 다시는 정학 당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다시 올드 페이스풀로 몇 번 더 채찍질을 하셨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의 아버지에게는 규칙이 있었으며, 우리가 그 규칙을 따르든지 아니면 필연적인 결과를 감수하든지 해야만 했다. 그분은 나를 체벌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길거리의 경찰관에게 잡히는 것보다 내가 널 체벌하는 게 낫다.”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그분이 내 곁에 안 계셨다면 나를 징계하시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13살이나 14살이 되면 완전히 통제가 불가능한 소년의 세대가 있다. 이들의 어머니들은 그들을 다루기에 육체적으로 너무나 약하고, 정서적으로 탈진했으며, 아버지도 그들 곁에 없다.
  
그래서 전해져 내려오는 영적 유산, 즉 신성한 준거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녀들에게 그런 유산을 전수해주기 시작해야 한다. 만약 영적 유산을 만들고 있지 않다면 그 점을 두고 고민하거나 오늘 당장 영적 유산을 만들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자녀들을 위하여 영적 유산을 확립하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역사하시는 것을 보고 싶다.”고 당신은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갖도록 하라. 오늘 당장 영적 유산을 만들기 시작하라!
  욥의 유산에 관한 또 한 가지 예를 보여주겠다.
(욥기 15)을 보라.

『 그 잔칫날들이 지나면 욥이 사람을 보내서 그들을 성결케 하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저주하였을까 하노라.” 함이더라. 욥은 계속해서 이같이 행하더라. 』

  아버지가 가족 제사장으로서 행동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당신이 마지막으로 자녀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구나.”라고 이야기했던 때가 언제인가?

(2) 진짜 남자는 존경을 받는다.

  ‘진짜 남자는 존경을 받는다’는 점이 내가 (욥기 29)에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두 번째 진리이다. 710절을 보라.

7 그때는 내가 성읍을 질러 성문으로 나갔으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였도다. 8 청년들은 나를 보고 숨었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일어나 서 있었도다. 9 통치자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렸도다. 10 귀족들이 잠잠하였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도다. 』

  욥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보라! 젊은이들은 숨었다. “욥이 왔다. 가자! 욥이 주위에 있을 땐 이런 짓을 하며 여기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당신이 아는 아이들 중에 이런 존경심으로 어른들을 대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이 볼링장에 갔었는데 몇몇 십대들이 온갖 욕설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게임을 방해하며 그곳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들은 어른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기 가서 그만하라고 하는 게 어때요?”
다른 사람들이 대답했다.
“당신 미쳤어?” 어른들은 이 아이들이 할지도 모르는 짓을 두려워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두려워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십대 집단이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무서워서 거리 반대편으로 건너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아이들은 아무도 존경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존경하지 않는가? 우리가 존경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우리를 존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욥은 “내가 나타나면 아이들은 도망쳤다. 미스터 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당신이 목사라면 적어도 조금쯤은 존경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당신이 나타나면 사내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목사님이 오셨어. 이제 욕은 못 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목사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자들이 다른 사람의 돈을 훔치거나 다른 남자의 여자와 간음하다 걸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욕을 해대는 것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목사가 나타나면 도망치거나 숨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미스터 욥은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서 그가 나타나면 노인들조차 일어섰다고 말한다. 또한
“지도자들”이나 왕자들도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욥이 성문에 앉으면 그들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바로 이것이 존경이다! 우리 자신도 흔히 다른 사람을 존경하기를 잊어버린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존경을 받지도 못한다.
  많은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의 증표를 얻어야 한다. 당신이 유대인이라면
‘바르 미츠바’(bar mitzvah)를 받는다. 그것은 성인 남자의 신분에 들어서는 것을 인정하는 의식이다. 어떤 아프리카 문화에서는 이제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냥을 나가서 고기를 잡아와야 한다.
  다른 말을 하자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소리다. 단지 몸집이나 연령, 그리고 과다한 성욕 때문에 이제 남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우리 남자 아이들에게도 성년 남자라는 인정과 존경을 얻을 수 있도록 거쳐야 하는 어떤 성년식이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가 나타나면 더 높은 기준이 그 자리에 나타났기에 욥은 존경을 받았다.

(3) 자비와 정의.

  진짜 남자의 세 번째 특성은 자비와 정의이다. 욥은 (욥기 291216)에서 이렇게 말한다.

12 이는 부르짖는 가난한 사람과 아비 없는 자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내가 구해 냈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의 복이 내게 임하였으며 또 내가 과부의 마음도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였도다. 14 내가 의로 옷입었더니 그 의가 나를 옷입혔도다. 나의 심판은 겉옷과 왕의 두건 같았도다. 15 내가 소경에게는 눈이 되었고 절름발이에게는 발이 되었으며 16 가난한 자에게는 아비가 되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이유를 찾아내었도다. 』

  진짜 남자는 고통 당하는 사람과 고통을 함께 한다. 진짜 남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다. 진짜 남자는 냉정하고, 무정하며, 무감각하고, 냉담하지 않다. 진짜 남자는 예수님을 닮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눈물을 흘린다. 욥은 성공적인 사업가였지만 동정심이 많기도 했다.
  나는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새미국표준역본)에 나온 위의 마지막 성구를 좋아한다.  HanSaRang 註. ─ I investigated the case which I did not know.[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을 조사해주었다.] 〔KJV〕the cause which I knew not I searched out.[내가 알지 못하는 그 이유를 찾아내었도다.] 욥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냈다. 모든 문제가 인종차별주의나 계급 차별이나 문화적 우월주의와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진짜 남자는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유혹하거나 협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정의의 사도이다. 때로는 인종차별과 같은 혐의가 정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것도 진상을 알아내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만이 문제 전체를 듣기 전에 입을 연다고 말했다. 욥은 정의와 자비를 잘 혼합했다. 우리도 역시 그래야 한다.

(4) 진짜 남자는 모든 행위가 반석과 같이 안정되어 있다.

  네 번째로, 진짜 남자는 안정적이다.12 이는 부르짖는 가난한 사람과 아비 없는 자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를 내가 구해 냈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의 복이 내게 임하였으며 또 내가 과부의 마음도 기쁨으로 노래하게 하였도다.』(욥기 29:12, 13).
  욥이 이야기하고 있던 것은 안정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서 세상이 흔들렸을 때에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릴 때 안정이 생각난다. 우리 가족은 볼티모어 슬럼가의 중심부에 살았다. 그곳은 험악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 집 밖에서 마약 거래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나는
“아빠, 이사 안 가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그분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다.
  나의 항의했다.
“아빠, 여기 사람들은 대낮에도 총 싸움을 해요. 왜 이사 안 가세요?”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주셨단다. 그분이 나를 하늘나라로 부르실 준비가 될 때까지 나를 보호해주실 거라고 믿는단다.” 나는 아버지의 대답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존중하기는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네가 집에 돌아오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는 곳이 이 집이 되길 바란다.” 이 얼마나 대단한 안정성인가!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당신을 그렇게 믿을 수 있는가?

(5) 진짜 남자는 지혜가 있다.

  마지막으로 진짜 남자는 지혜가 있다.21 사람들이 내게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며 내 권고에 잠잠하였도다. 22 내 말이 있은 후에는 그들이 다시 말하지 아니하였고 내 말이 그들 위에 내렸도다.』(욥기 29:21, 22).
  욥이 말했다.
“사람들은 충고를 듣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내가 그들의 상담자였다.” 왜인가? 그의 입술과 그의 삶에서 지혜가 우러났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남자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분의 마음을 안다. 지혜는 일상생활 중에 직면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진리를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 부모와 조부모님에게서 우러나오던 일상적인
‘신성화된 상식’과 같은 지혜를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아이들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다. 아이들에게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그것을 얻지 못한다. 이들이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남자란 무엇인가? 그는 영적 유산을 남겨두는 사람이다! 그는 타인의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자비와 정의의 균형을 맞추고, 안정성이 굳건한 반석과 같은 남자이다! 그는 거룩한 지혜를 나눌 수 있는 남자이다!

세상이 당신의 성경적인 남성다움을 빼앗은 것처럼 보여서 좌절감에 빠졌는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나이가 됨으로 당신의 본분을 되찾으라! 그러면 아내와 자녀들이 당신의 리더십을 기쁨으로 따를 것이다!

────────────────────────────────────
   토니 에반스 /『 진짜 남자 』(제9장ː진짜 남자란?) ...
────────────────────────────────────

   No More Excuses  (원제: 변명은 이제 그만)
   by
   Tony Evans

   Copyright ⓒ 1996 by Evans, Tony
   Published by Crossway Books
   a division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linois 60187, U.S.A.
   All rights reserved.

   Used and translated by the permission of Crossway Books through
   the arrangement of KCBS Literary Agency, Seoul, Korea.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6 by Infiniss, Seoul, Korea.

 제9ː진짜 남자란

(337) 주 날개 밑 즐겁도다∼♪∼♬

1. 주 날개 밑 내가 편히 거하네 밤이 어둡고 큰 바람 부나∼♪
      아버지께서 날 지킬 줄 아니 겁내지 않고 잘 쉬리로다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되니 그 안에 쉬기를 원하노라
      이 세상 내 슬픔 위로 못하나 주님이 안위와 복 주시네

3. 주 날개 밑 귀한 희락이 있네 생전에 걱정 다 지나도록
      거기서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예수께 쉬어 든든합니다

      【후 렴】
      주 날개 밑 즐겁도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토록 거하겠∼네∼♩∼♪♬

Bible believers

──────────────────────────────────────────────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

【  설교 듣기 】

 2015. 10. 12.오전

가장 잘 사는 인생 〔 이 송오 목사

151012am4919

(데살로니가전서 5:111
1 ○ 그러나 형제들아, 그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으니 2 이는 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 때에, 아이 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너희를 도둑같이 덮치지 못하리라. 5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라.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노라. 6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자. 7 이는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이라.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하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인 투구를 쓰자. 9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노를 받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라. 10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 11 ○ 그러므로 너희가 행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 주라.

(요한일서 2:1517)
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17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서시(序詩) 』

                      윤동주(1917~1945)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완성)

『 뜨거운 가마 속에서 구워낸 도자기는 결코 빛깔이 바래는 일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아픔에 단련된 사람의 인격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안락은 악마를 만들고 고난은 사람을 만든다. 』  ─ 쿠노 피셔

(Kuno Fischer18241907독일의 철학자, 교육자)

『 길고 짧은 것은 한 생각에 달려 있고, 넓고 좁은 것은 한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하루가 천 년보다 길고, 뜻이 넓은 사람은 좁은 방도 하늘과 땅 사이만큼 넓다. 』

채근담

Bible Belie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