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7. 30. 11:13

“ 복이 있는 자 ” (양육/성장)

● 산상 설교 ː “복이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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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Matthew 5

10 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0 Blessed are they which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산상 설교 ː “복이 있는 자”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로운 일을 위한 고난과 주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과 옳은 판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유와 행복, 권익과 의, 영예와 폭력을 단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판단과 행동에서 제자들은 세상과 구별됩니다. 그들은 세상의 거리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업적에 대한 세상의 대가는 신임이 아니라 배척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 한갓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옳은 일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데서 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저 ‘가난한 사람’에게서와 꼭 같은 약속이 허락되었습니다. 박해를 받는 자로서의 그들은 ‘가난한 자’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 축복의 결론에서 남은 문제는, 이 세상 어느 곳에 이러한 교회가 도대체 아직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교회를 위한 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 즉 가장 가난한 분, 가장 괴로움을 당한 분, 가장 온유한 분이 계신 분, 다시 말하면 골고다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축복을 받은 자들의 교회는 곧 십자가에 못박힌 분의 교회인 것입니다. 이 교회는 십자가를 진 분과 함께 모든 것을 잃고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습니다. 십자가로부터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하는 축복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홀로 이것을 이해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꾸며 갖은 악한말로 너희를 거슬러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크게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앞서 있었던 선지자들도 그들이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 12).
‘나로 인하여’
제자들은 업신여김을 받으므로 그것에 적중되는 이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모든 것은 그의 위에 떨어집니다. 그를 위하여 업신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지는 분은 그 분입니다. 업신여기는 말, 죽음에 가까운 핍박, 악의의 비방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공동체에서 받는 제자들의 축복을 오히려 확인합니다. 그러나 이방인에 대하여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과 폭력과 비방으로 고함 치는 일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난한 자들과 온순한 사람들의 소리가 지나치게 위협적이며 지나치게 크면서도 참음은 지나치게 조용한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무리가 세상의 불의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과 가난은 지나치게 세력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살인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도다’라고 기뻐할 때 세상은 그들을 축출하라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축출! 그러나 어디로? 하늘나라로?12 기뻐하고 크게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가난한 자들이 저기 기뻐하면서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우는 자에게서 외로움의 눈물을 씻기고 배고픈 자들을 성찬으로 먹게 합니다. 상처 입고 고문당한 몸들이 새 몸으로 변하고 죄와 참회의 옷 대신에 영원한 의의 흰 옷을 입습니다. 이 영원한 기쁨으로부터 십자가 아래서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로 오라는 부름이, 주 예수님의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하는 부름이 절박하게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13 ○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이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 버려서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
15 또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곡식 되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나니, 그러면 빛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의 선행을 보게 하고, 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3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14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15 Neither do men light a candle, and put it under a bushel, but on a candlestick; and it giveth light unto all that are in the house.
16 Let your light so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산상 설교 ː “보이는 교회”

축복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분을 따르는 은혜를 받고,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축복받는 자들이 하늘나라에서는 귀한 자들로 이 땅 위에서는 철두철미 무가치하고 소용없는 장해물 같이 보였으나 이 구절에서는 지상에서도 그들은 없을 수 없는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위하여 가장 귀한 재산이며 세상이 가지고 있는 최고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없이는 세상은 연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금에 의하여 세상은 보존되고 자신들이 버리는 이 가난한 자들과 천한 자들과 약한 자들 때문에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축출한다는 것은 결국 자살 행위인 것입니다. 이 ‘내버림을 받은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계속 유지됩니다. 기적이 아닙니까! ‘신적인 소금’(호머)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온 세상을 작용합니다. 이 말씀이 세상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늘나라만을 향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그들의 사명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임이 있는 자들로서의 그들은 동시에 세상의 소금이라는 직책을 지시받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가리켜 소금이라 명명함은 지상에서의 사명을 그들에게 지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의 동역자(同役者)가 되었습니다.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머무르면서 제자들에게는 온 세상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금은 그 맛을 잃지 않을 때 부패를 방지하며, 소금의 맛을 나게 하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세상은 소금에 의하여 계속 보존될 것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위하여 소금은 맛을 잃지 않아야 하며 제자들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의하여 존속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의 그의 참된 역할은, 지속케 하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고, 썩지 않고 생생하게 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서는 제사 지낼 때 소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레위기 213┃민수기 1819┃에스겔 164). 교회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소금이 변하지 않았을 때 나타납니다.
13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너희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되려고 한다든가 안한다든가 하는 제자들의 의지가 여기서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 달라는 호소도 아닙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부름의 능력으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이미 소금입니다. 너희들은 소금이라 했습니다. 너희들은 소금을 가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제자들의 복음과 소금을 동일시해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의하여 전 생활이 새로운 근거를 가지게 되는 한, 그들의 전 생활을 즉 축복을 받은 자들의 전 생활을 소금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사로잡혀 그를 따른다면 그는 또한 이 부름에 따라 그의 전 생활이 세상의 소금인 것입니다.
이것은 소금이 소금이기를 그만두고 맛을 잃을 수 있다는 다른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맛을 잃으면 밖에 내버리는 외에 달리 쓸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의 특징입니다. 무엇이나 짜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맛을 잃으면 다시는 자신도 짜게 못합니다. 무엇이나 즉 썩은 물질도 소금에 의하여 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맛 잃은 소금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또 제자들의 교회를 위협하는 심판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 교회에 의하여 구출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만일 교회이기를 그치면 무엇으로든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은 너는 소금이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멸망시키고 따르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름이 스스로 부름받은 자를 멸망케 합니다. 다시 한 번이라는 구원의 가능성은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소금과 같은 보이지 않는 역할 뿐 아니라 빛과 같은 보이는 광명의 역할도 제자들의 교회에는 예수님의 부름에 따라 약속되었습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역시 ‘너희들은 빛이어야 한다’가 아닙니다. 부르심 그 자체가 그들을 빛으로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보이는 빛일 수밖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빛이 아니라면 분명 부름이 그들에게는 없는 징조입니다. 누가 만일 세상의 빛이 되고자 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하나의 무의미하고 있을 수 없는 망상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름에 의하여 따름으로 그렇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역시 ‘너희들은 빛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고, 너희들은 빛이라 했습니다. 너희들에게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너희들의 설교 같은 것이 아니라 너희들 자신이 빛이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같은 분이 제자들에게도 너희들이 부름에 머무르는 한, 전 생활 속에서 너희들은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빛인 까닭에 너희들이 숨고 싶어도 도저히 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빛이 빛나면 산 위에 성읍이 숨지 못합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전한 마을이든 수비되는 성읍이든 혹은 허물어진 성읍이든 멀리서도 볼 수 있는 뚜렷한 존재인 것입니다. 산 위의 성읍 ─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높이 쌓아 올린 성읍,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은 제자들의 교회입니다. 뒤를 따라 나선 자들에게는 무엇을 하든 결단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단 하나의 결단은 이미 떨어졌습니다. 지금 그들은 그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은 보이는 교회요 그들의 따름은 보이는 행함이어서 이 행함으로써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따름은 어두운 밤의 빛이나 평지의 산같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불투명 속으로의 도피는 부름의 거부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되려는 예수님의 교회는 이미 따르는 교회가 아닙니다.
15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곡식 되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나니, 그러면 빛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역시 여기에도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빛을 자의로 가리는 사실, 빛을 말 아래 놓는 사실, 부름을 거부하는 사실, 보이는 교회가 자기 빛을 감추려는 말은 사람을 두려워함이며, 어떤 목적을 위한, 그것이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이든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든 ─이 때의 사랑은 이미 잘못 이해되었습니다.─ 의식적인 세상 허식 같은 것일 것입니다. 또한 ─ 이것은 한층 더 위험한 바─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감히 자칭하는 소위 종교개혁적 신학일 수도 있는데 이 신학의 표지는 ‘바리새적’인 가시성을 싫어한 나머지 전적으로 세상 허식에 동화되어 버린 ‘겸손’한 불가시성에 특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가시성이 아니라, 시민적인 의를 수호하는 데, 교회의 표지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즉 빛이 빛나지 않는 데 기독교의 중심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이방에) 너희들의 빛을 비추라 하였습니다. 여하간 이 빛은 지금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복이 있다는 이 제자들이, 빛내야 한다는 빛은 어떤 것일까요? 제자들은 빛내야 할 빛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 아닙니까? 도대체 이 십자가의 불가시성이나 은폐성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자들도 은근해야 하고 나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은 이 십자가에 은폐되어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여하간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교회가 세상 의식에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론화하는 자는 좋지 못한 괴변가라 하겠습니다. 단순히 듣는 자라면 누구나 저 곳 십자가에 어떤 비범한 것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모두 시민의 의나 십자가가 세상 허식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십자가는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놀라도록 암흑 중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그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버림을 받고 고난을 당해야 했다는 사실, 그의 생명이 성문 앞 수치의 언덕 위에서 숨졌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그 가시성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 빛에서 제자들의 선한 업적은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 자신이 아니라 선한 업적을 세상이 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에서 볼 수 있는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이 선한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렀을 때, 십자가 아래서 그들을 세상의 빛으로 만들었을 때, 그 자신이 그들에게서 지은 것 ─ 빈곤, 이방인의 외로움, 친절, 화평 그리고 끝으로 박해와 버림받는 것, 한마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저 쪽에서 빛나는 이상한 빛이어서 이 빛으로만 사람들은 제자들의 이 선한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볼 수 있다 하였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이며 십자가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업적이 보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축복받은 자들의 궁핍과 단념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그러나 십자가나 이러한 교회로 인하여 사람 자신이 찬양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 선한 일들이 인간의 여러 가지 덕을 의미한다면 이 일들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제자들 자신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제자들에게나 빛을 빛내며 산 위에 뚜렷하게 서 있는 교회에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선한 일 때문에 찬양을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십자가와 십자가의 교회를 보고 확실히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활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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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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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HFOLGE
by
Detrich Bonhoeffer

1965Korean b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Korea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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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기 】

날짜ː 2007. 7. 22.오전
▶ 제목ː복음을 빙자하여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요한계시록 157
시간ː5724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7

날짜ː 2007. 7. 22.오후
▶ 제목ː멸망의 아들을 식별하라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에스겔 212527
시간ː010000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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