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4. 22:10

“ 형 제 ” (양육/성장)

● 산상 설교 ː “형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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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Matthew 5

21 ○너희는 옛사람들이 말했던 바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살인한 자는 누구나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 고 한 것을 들었으나,
2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까닭없이 자기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며, 형제에게 라카라 하는 누구나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될 거시요, 또 어리석은 자라 하는 누구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
23 그러므로 만일 네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가 네게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네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는 너의 대적과 함께 길에 있는 동안에 그와 속히 화해하라. 그 대적이 어느 때나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지 않게 하고, 재판관도 너를 간수에게 넘겨주지 않게 하여 감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26 진실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마지막 한 고드란트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1 ¶ Ye have heard that it was said by them of old time, Thou shalt not kill; and whosoever shall kill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22 But I say unto you,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
23 Therefore if thou bring thy gift to the alter, and there rememberest that thy brother hath ought against thee;
24 Leave there thy gift before the alter, and go thy way; first be reconciled to thy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thy gift.
25Agree with thine adversary quickly, whiles thou art in the way with him; lest at any time the adversary deliver thee to the judge, and the judge deliver thee to the officer, and thou be cast into prison.
26 Verily I say unto thee, Thou shalt by no means come out thence, till thou hast paid the uttermost farthing.

산상 설교 ː “형 제”

2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I say unto you,이 말은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종합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전장에서 본 바에 의하면 예수님을 혁명가나 랍비들의 의견을 뒤집는 반동자로 볼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옛 말을 이어받고 모세의 약속인 율법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율법과 실제로 일치한다는 점이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을 제정하는 데 친히 참여하였다는 것을 밝힌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듣는 자만이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이해가 범죄적 잘못에 대한 이해였던 만큼 다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도록 빈 틈을 남기지 않으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주인으로 율법을 행한 자로 인식할 때에만 율법을 참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에 축복을 내리면서 그것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축복함으로 율법이 본래 바라는 것을 그분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이러한 일치와 율법의 오해는 서로 적대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분은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율법을 위한 잘못된 열심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라 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지시한 계명은 살인을 금한 것과 형제를 그들에게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형제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정한 바요 그가 보호하는 대상이니 그의 생사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의 자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있을 수 없습니다. 송사하는 자는 그 송사에 자기가 걸려들고야 맙니다. 하나님이 계명으로써 보호하는 형제는 교회의 형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행동과 행동의 상대자가 아니라 오직 순종과 불순종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죽는 것을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할 만한 경우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살인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 침범할 수 없는 한계가 곧 형제의 생명입니다. 이 경계선은 하찮은 분노에 의하여서도 침범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침범은 무의식 중에서 나오는 좋지 못한 말(미련한 놈)에서 시작하여 의식적인 욕설(어리석은 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모든 분노는 형제의 생명을 노리고 오히려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생명을 없이 하려는 것입니다. 소위 ‘의(義)의 분노’와 ‘불의(不義)한 분노’의 구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 없이 튀어 나오는 욕설은 우리가 형제를 위할 줄 모른다는 사실과 교만하여 형제를 위압하고 자기 생명을 형제의 것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가 형제를 구타하는 것이나 그의 가슴을 찌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욕설은 그것에 맞아 상처를 입고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적인 욕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에서 형제의 명예를 박탈하려는 데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형제를 멸시하도록 하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하여 형제의 안팎 생활을 모조리 해치자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내가 형제를 심판하면 그 이유를 막론하고 그것은 곧 살인이라고 하여도 좋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고야 맙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욕하는 자, 공공연하게 헐뜯고 멸시하는 자는 곧 살인자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설 곳이 없는 자입니다. 형제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도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오는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제물, 그의 경배, 그의 기도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랍비에게서와는 달리 예배에 형제에 대한 봉사가 언제나 따라야 합니다. 형제에 대한 멸시는 예배를 무효로 만들고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빼앗아 가고 맙니다. 개인이나 교회를 막론하고 형제에 대한 멸시와 불화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모임에 불과할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봉사와 사람이 물시(
勿施:해 온 일을 무효로 함.)되고 형제가 멸시로 인하여 희생이 되고 형제가 나 개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 원한을 품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분노가 아니라 이미 나로 인하여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그리고 멸시를 받고 있는 형제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교회가 항상 반성해야 할 것은 어디서 어떤 형제에게 범죄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에 추파를 던진 나머지 형제를 세상과 더불어 미워하고 세상과 함께 멸시하며 세상이 하듯이 욕함으로써 형제의 살인자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와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많은 불평의 소리들이 교회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그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는가 깊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욕하고 무시하는 형제들에게 생명을 보존하고 지탱하며 보호하는 주 예수님의 사랑의 표시를 증거함으로써 보여 준 일이 있는지 하나님의 교회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올바른 예배도 아주 겸손한 기도도 아주 용감한 신앙 고백도 교회를 위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은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등한시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 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한 형제가 멸시당하는데 한쪽에서는 경배받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아버지이시므로 그러합니다. 우리들 전체의 형제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곧 그 분입니다. 여기에 형제 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멸시와 욕을 당한 그의 아들을 아버지가 버리지 않습니다. 또 그의 아들과 같은 형상이 되어 그를 위하여 욕을 당하는 형제들도 버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예배를 형제 봉사에서 떼어 놓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께 진실된 예배를 드리려는 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은 형제와 더불어 화목하는 길입니다. 불화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자는 그것으로 오히려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이미 살인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24 가서네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바라는 어려운 길입니다. 이 길은 많은 굴욕과 멸시에 젖은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에게 이르는 길이며 은혜에 충만한 길입니다. 이 예수님에게서 ‘작은 형제’와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일치합니다. 그는 먼저 형제와 화목한 뒤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산 제물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제는 아직 은혜의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형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형제와 더불어 길을 가고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형제를 위할 수 있는 때에 처하여 있으며 우리의 빚을 갚을 기회가 우리에게 아직 있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서야 할 때는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기회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극히 작은 허물에 이르기까지 법의 다스림과 형벌만이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된 사람에게는 형제가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형제를 즐겁게 하고 그가 진리를 찾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형제들과 화목할 수 있는 것도 이 은혜의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는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명하시는 분은 홀로 우리의 형제와 은혜가 되시고 심판대 앞에서 화목과 구원이 되실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분의 몸에서 형제가 되었으면 이 형제는 또한 우리의 은혜로 선사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 은혜를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형제를 위한 봉사, 형제를 기쁘게 하는 일, 형제에게 권리와 생명을 마련해 주는 일은 자기를 죽이는 길이요,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개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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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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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HFOLGE
by
Detrich Bonhoeffer

1965Korean b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Korea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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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기 】

날짜ː 2007. 7. 29.오전
▶ 제목ː인류의 4대 적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신명기 1369
시간ː4658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6

날짜ː 2007. 7. 29.오후
▶ 제목ː어린 양의 혼인식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요한계시록 1979
시간ː4336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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