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5. 18:51

“ 보 복 ” (양육/성장)

● 산상 설교 ː “ 보 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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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Matthew 5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말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도 돌려 대라.
40 또 만일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너의 웃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외투까지도 갖게 하라.
41 또 누구든지 너에게 억지로 일미리오를 가자고 하거든 이 미리오를 동행해 주라.
42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너에게 빌리고자 하는 자로부터 돌아서지 말라.

38 ¶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39 But I say unto you, That ye resist not evil but whosoever shall smite thee on they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40 And if any man will sue thee at the law, and take away thy coat, let him have thy cloke also.
41 And whosoever shall compel thee to go a mile, go with him twain.
42 Give to him that asketh thee, and from him that would borrow of thee turn not thou away.

산상 설교 ː “보 복”

여기에서 예수님은38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라는 말을 위에서와 같이 구약의 계명, 즉 십계명의 살인에 대한 금령처럼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전ㆍ후자를 똑같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ㆍ후자는 모두 폐기될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꼭 같이 채워져야 합니다. 십계명을 위시하여 구약의 계명에 가치의 차를 두고 구별하는 우리의 태도를 예수님께서는 용납치 않습니다. 계명은 오직 구약의 것 하나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자들의 생활은 그러므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생활입니다. 그의 복을 받는 자도 이렇게 온유한 자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도 다시 그 재물에 매어 달리는 자는 이미 제자의 길을 버린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미 복이 있는 자라는 축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권위를 신적 보복에 두고 있습니다. 보복 없는 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옳은 공동 생활을 이루는 데 있으니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 생활을 악이 없이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율법은 보복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면서 직책을 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악을 확인하고 극복하며 제자들의 교회를 참된 이스라엘의 것으로 다짐하는 보복의 힘을 긍정하였습니다. 바른 보복에 의하여 불의는 제거되고 그렇게 됨으로 제자들의 길은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참된 보복’은 오직 악을 갚지 않는 데 있다 한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정치적 법적 질서에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생활 형태에서 해방시키고 참된 정치나 민족적으로 무관한 신자들의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보복이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른 정치 제도와 함께 위험을 대비한 힘있는 반격을 뜻하였다면, 이미 정치나 법적으로 아무런 진리도 고집할 수 없는 제자들의 교회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계명을 따라 고난을 참으면서 위험에 대비하라는 것은 지당한 말씀입니다.
사실 ‘참된 생활체’는 이렇게만 이루어지고 유지됩니다.
여기에서, 불공평한 취급을 당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는 귀중한 소유인 자신의 권리에 이미 생명을 걸지 않고 모든 재물에서 완전히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바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증거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부담력 있는 유일한 생활 공동체의 근본 터전이 되고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부탁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극복하는 길은 그의 악을 묵살하고 저항하지 않음으로 점점 더 새로 번져 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악은 상대자와 저항력을 잃을 때, 우리가 오히려 자진해서 악을 참고 악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서 참을 때 그 힘을 잃고 기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악은 괴롭게 할 대상을 잃기 때문입니다. 악에 대한 저항력이 최후를 고할 때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중지할 때 비로소 악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이 때, 악은 대상을 잃고 목적한 악을 다시 낳는 일에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고난도 피하지 않고 당할 때, 생기를 잃습니다. 우리를 해하는 악도 우리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면 끝이 나는 법입니다. 멸시와 훼손도 대적하는 자를 발견하지 못하면, 또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결국 그의 정체를 죄로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폭행도 상대력을 발견하지 못할 때 끝장이 납니다. 나의 속옷에 대한 부당한 요구도 겉옷을 더 보태 주는 데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낼 것입니다. 나의 노동의 대가가 착취로 나타나는 곳도 그것을 저지하지 않는 곳입니다.
요구하는 대로 무엇이나 하고 줄 용의가 있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다만 그를 따른다는 결의를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자위를 스스로 단념한다는 것은 제자의 길을 가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무조건 매달림으로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다는 것을 입증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의뢰에서만 악은 극복됩니다.
문제는 악뿐이 아닙니다. 악인도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악하다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단념하는 행동은 폭력을 가하는 자나 나를 협박하는 자를 무죄하다고 하거나 변명해 주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쓰라림을 참는 것이 악한 자의 악의를 인정하고 변명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감상적 이해를 예수님께서는 알지 못합니다. 명예를 훼손하는 몽둥이, 폭행, 착취는 그의 악한 본성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제자는 악을 악으로 알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악은 악하다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이렇게 하는 길만이 악한 자를 때리고 넘어뜨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맞서는 악, 이것은 전혀 변명할 여지 없는 악이기 때문에 제자는 오히려 맞서지 않고 참음으로 악이 끝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이 길은 악인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자발적 수난은 악보다 강하기 때문에 곧 악인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믿는 자로서의 행동으로 악을 극복하기에는 그 악이 너무 크고 강한 것이라 하여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서는 안 됩니다. 악이 벅차면 벅찰수록 제자는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곧 악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와 맞서게 하는 일입니다.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와 직접 담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의 큰 새로운 생각을 발견한 바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적인 개인에 관계되는 불의요, 다른 하나는 공적인 개인 즉 하나님께서 위탁한 직책을 수행할 때 받는 고난의 경우였습니다. 이 견해의 첫 경우는 사적 개인에 관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명령한 바와 같이 수행해야 할 것이나 둘째 경우는 달리 참사랑에 관한 것이라 하여 반대 행동, 즉 폭력은 폭력으로 악의 침해는 대항으로 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을 막기 위하여 일반적 법적 수단과 전쟁을 이용하는데 종교개혁자들의 이 태도는 그의 변명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행위의 표준으로, 개인인 나와 직책을 가진 나 사이의 이러한 구별을 아는 바 없습니다. 그분은 이런 구별에 대하여 한 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상대하고 말하는 제자들은 그를 따르기 위하여 이미 모든 것을 버린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적(私的)으로도 공적(公的)으로도 구별 없이 꼭 같이 엄격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을 공ㆍ사로 나누어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구별 없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또 이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사적으로 생활하는 장소와 공적으로 생활하는 장소가 실제에 있어서 다를 수 있습니까? 박해를 받는 자는 아이들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설교자요,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자가 아닙니까. 박해에 실지로 당면하면 구별할 겨를도 없이 ─ 모두 직책 때문이라는 구실 밑에서─ 항거하게 되지 않습니까. 공적 사무를 수행하는 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신 자가 아닙니까. 구별을 억지로 해 보려는 자는 결국 따르는 사람이 언제나 혼자 있으면서 마지막에는 혼자 행동하고 혼자 모든 짓을 결정해야 하는 사적 개인임을 잊은 것이 아닙니까. 사실은 이 외로운 행동 속에 부탁받은 직책을 수행하는 참된 진지성이 들어 있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악은 결국 악한 자에게서 불을 붙이고 저항하지 못하는 자에게서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하는데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비추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이 말씀은 결국 현실에 맞지 않는 한갓 이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세상의 죄 때문이라는 말로 간단히 이 현실을 변명해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은 오직 교회에서만 타당성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이 말씀은 광신적 이상으로 간과해 버리는 것같이도 보입니다. 그리하여 흔히 말하기를 우리는 세상에 살고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적합한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바로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우리를 위하여 적합하게 하신 것입니다.
39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누가 만일 나 ─ 사실 그는 태어난 첫날부터 마귀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이지만─ 는 악의 위력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가장 혹독하게 비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을 악하다 하고 또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일반적 윤리 프로그램으로 파악하고 악을 오직 선으로 극복하라는 말씀을 일반적 세속적 지혜나 처세술로 파악한다면 제자들에게 했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사실 모두 광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때에는 또 이 말씀은 율법의 책임을 지지 않는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세상은 이 계명을 결코 좇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무저항이 세상 생활의 원리가 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은혜로 보존하는 세상 질서를 폭력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이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악에 몰려 십자가에서 친히 패배를 당하고 이 패전에서 다시 정복자, 승리자가 된 분입니다. 악을 고난으로 정복하라는 분은 바로 이 분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곧 이 분 자신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정복에 대한 신앙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자는 그의 계명도 반드시 순종할 것이며 이 순종에서 그는 다시 소망도 얻을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소유하고 그의 승리에 같이 참여하는 소망을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수난 ─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악의 극복인데─ 은 ‘
순종하는 힘’ 을 제자에게 주는 유일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계명으로 제자들을 자신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만일 이 고난에서 도피하거나 몸으로 그것을 욕되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그들의 설교가 어찌 자신 있고 믿음직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율법을 행함으로 십자가에서(1) 그것을 완전케 하고 동시에 십자가의 공동 생활에서 계명으로 제자들을 은혜롭게 돌보는 것입니다. 악의 보복과 극복이 십자가에서 동시에 실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공동 생활은 따르라는 부름에서 제자들에게 선사된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교회요, 여기에서 따르는 자들은 축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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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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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 】

(1) 십자가에서ː“요한복음 1823”을 증거로 삼고 예수님 자신이 자기 계명을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 자신도 순종에서 도피하려는 것은 심히 불손한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악한 것이라 하면서도 그것을 저항하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8:23)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만일 내가 잘못 말하였으면 잘못된 것에 대하여 증거를 대라. 그러나 내가 올바른 말을 했는데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고 하시더라.

NACHFOLGE
by
Detrich Bonhoeffer

1965Korean b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Korea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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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기 】

날짜ː 2006. 7. 16.오전
▶ 제목ː인간의 가장 큰 약점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야고보서 41317
시간ː5252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5

성경 강해 】

날짜ː 2004. 1. 25.오전
▶ 제목ː욥기 강해 25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욥기 23162412
시간ː3432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5

Bible Belie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