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22. 22:03

“ ‘교역자 공급 과잉’이 하나님의 뜻인가? ” (바른 분별)

    바른 분별 ● “교역자 공급 과잉”이 하나님의 뜻인가?


    ────────────────────────────

    기독교신문에서 자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단마다 교역자 공급 과잉 현상이 심각하며, 신학대 졸업생이 교회 수에 비해 너무 많다고 한다. 감리교는 지난 10년간 연회에 허입이 안된 신대원 졸업생만 무려 1170여명에 이르고, 해마다 수백 명이 안수를 받아도 교회는 고작 200개미만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신문 조사 결과, 국내 주요 8개 교단이 직영하는 17개 신학대학원에서 이번에 배출된 목회학석사 수는 총 2319명이었다. 신문은 8개 교단이 신학대학원이 17개나 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학교들의 총 졸업생 수가 웬만한 중급 이상의 교단을 하나 만들 수 있는 수준이라는 사실에 더 놀라워했다. 기타 엄청나게 많은 무인가 신학대학원들의 목회학석사 졸업생까지 합한다면 그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신문은 신학대학원 졸업생의 공급 과잉 현상이 이미 손을 쓰기 힘든 지경에 도달한 것으로 판단을 내렸으며, 교회측과 학교측이 각각 다른 처방을 내놓아 혼선만 가중시키는 가운데 신학교 정원 조정 등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교회와 신학교가 공멸할 것으로 내다봤다.
    오늘날 교역자 공급과잉의 기현상은 목사의 ‘성경적 자격 요건’을 모르는 이들이 비성경적인 교단과 교단 교회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성경이 목사의 자격에 대해 말씀하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들을 살펴보자.

    첫째,『장로회에서 안수함으로써』(디모데전서 4:14).
    교단은 특정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교리를 형성해 모인 비성경적인 단체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성경의 80% 이상이 가려져 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이들이 칼빈과 같은 ‘사람’을 추종하여 세운 것이 바로 ‘교단’이다.
    교단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육신의 열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 안수를 교단이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목사 안수는 비성경적인 교단에서 주는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4:14의 “장로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아니다. 이 말씀은 목사 안수식 때 선임 목사들이 피안수자에게 손을 얻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디모데전서의 선임 목사들은 ‘교단’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역 교회의 목사들이다. 목사 안수는 교단이 아니라 선임 목사들이 주는 것이며, 물론 그 선임 목사들은 교단과 무관한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하였으며(디모데전서 522), 디도에게도 크레테의 “각 성읍에 장로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디도서 15). 디모데와 디도는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이었는가? 그들은 지역 교회의 목사들이었으며, 목사 안수는 지역 교회의 선임 목사들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 직분은 교단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얻을 수 있는 직분이 아니다. 목사 안수는 교단과는 무관한 일이며, 전적으로 주님께서 세우시고 인정하는 “지역교회”에 맡겨진 일이다. 그러나 지역교회라고 다 같은 지역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는 비성경적인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들을 양성할 수 있는 성경대로 믿고 침례를 주는 신약 지역교회여야만 한다.

    둘째,『교리에 주의하여』(디모데전서 4:16),『가르치기를 잘하고』(디모데전서 3:2).
    목사는 무엇보다도 “교리에 주의하여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성경의 목적 중 “교리”를 가장 먼저 언급한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ː변개된 ‘한글개역/개역개정판’은 “교리”를 ‘교훈’을 바꿔버려 “교리”의 중요성을 가렸다). 목사 직분에 뜻을 둔 사람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교리”이다. 그러나 “어떤”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건전한 교리에 부합되는 것들을 말하라.”고 명령한다(디도서 21). 장로교의 ‘칼빈주의’가 건전한 교리인가? 감리교, 성결교의 ‘알미니안주의’가 그러한가? 아니면 물에 들어갔다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캠벨주의’가 그러한가? 이들 교리들은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교리이다. “건전한 교리”“성경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하라”는 디모데후서 215의 명령에 순종한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이다.(변개된 성경들은 디모데후서의 이 구절마저도 “나누어서”(Divide)를 ‘분별하여’로 바꿔버려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서” 공부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을 가려버렸다.)
    그들 각 교단에게 누구의 교리가
    “건전한 교리”냐고 물어보면, 다들 자기 교리가 건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을 어기고 사람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은 교리의 “건전성”을 판단할 기준이 없다. 그래서 교리 때문에 서로를 헐뜯지 않는 것이 양반답고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공의”의 하나님을 저버리고 교회연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도 확신할 수 없는 교단 교리를 서로 눈감아주고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연합운동을 벌이는 것은 그들의 비성경적인 비리를 숨기고 거기서 함께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이다. 그들은 “건전한 교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교단 교리는 성경적 교리가 아니기에, 교단 교리로 세뇌된 사람은 목사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없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토록 부패하게 된 것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칠 수 없는 신학교 졸업생들이 목회를 한다며 진리를 변질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변질은 “건전한 교리”가 없는 교단 신학교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셋째,『전도자의 일을 하고』(디모데후서 4:5).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내게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는 내가 부득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정녕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린도전서 9:16). 목사가 되고 싶다면, 지옥에 갈 혼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하며, 복음전파자로서의 사명과 의무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에 와보십시오.”라든지, 어떤 목사처럼 “예수님 믿으면 성공합니다.” “예수님 믿으면 병이 나아요.” 하거나, 어깨에 ‘할렐루야,’ ‘OOO교회’ 띠를 두르고 말없이 교회 주소와 전화번호 적힌 티슈를 나눠주거나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퍼주는 일, 또 공공장소에서 복음성가와 CCM을 부르거나, 길거리에서 불우이웃돕기 바자회 따위를 여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을 복음전파라고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다. 지옥에 갈 죄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그들의 죄가 사해진다는 것을 전하여 그들이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능력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로마서 116). 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혼들이 구원을 받고 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열매가 맺힐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성령께서 쓰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특히 그가 “남자”일 때는(디모데전서 32 『감독은...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그에게서 목회자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단 교회의 목회자들의 현실은, 1년에 단 한 명의 죄인도 복음으로 주님께 이겨올 줄 모르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한다며 책상에 앉아있거나 한기총이나 교회협의회나 들락거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태반이며, 거의 대부분이 ‘돈이 되는’ 심방이나 부흥회는 다닐 줄 알면서 거리에서 죽어가는 혼들에게는 복음을 ‘값없이’ 전할 줄은 모른다. 복음을 전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목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목회에 뜻을 품은 이가 있다면, 이것이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성경 공부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 일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자 의무에 속한다.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 다 사역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로서 갖춰야 할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교단의 그늘에서 뭔가를 해보려 했기 때문에 목회자 공급 과잉현상이 풀지 못할 숙제로 떠오른 것이다.
    교역자 공급 과잉현상은 비성경적인 교단 신학교들과 그들의 교회들이 낳은 필연적인 병폐이다. 목사들이 할 일 없이 남아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주님께서는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들이 적구나, 그러므로 추수의 주께 기도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태복음 9:37, 38)고 하셨다. 그들 잉여 목회자들이 추수의 주께서 보내신 추수할 일꾼들이라면 왜 주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은 주님의 뜻에서 벗어난 사람들인 것이다.

    ──────────────────────────
    인터넷 신문 ‘바이블 파워’ (2008-3-19) ...
    ──────────────────────────


    『 “교역자 공급 과잉”이 하나님의 뜻인가? 』
    by
    ■「바이블 파워」/2008. 3. 19

    Copyright ⓒ 2005~2008 biblepower.co.kr All rights reserved.

    Bible Believers.

    ────────────────────────────

    설교 듣기 】

    날짜ː【 2006. 10. 1. (오전) 】
    ▶ 제목ː내적 우상을 제거하라 (이 송오 목사)
    성경구절ː(에스겔 141∼11)
    시간ː(5010)
    주소ːmms://211.200.28.142/bbc/20061001am.wma

    Bible Belie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