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4. 21:51

“ 법률보다 중요한 것 ” (에세이 모음-④)

(글모음) [20061005] ● 법률보다 중요한 것 ... (에세이 모음-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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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aceful Hymns on Violinㆍ잔잔한 찬송가 바이올린 연주 모음┃(53:39)

법률보다 중요한 것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⑩ ━ “ 법률보다 중요한 것 ”

  금년 3월에, 키쿠다라는 의사에 대한 판결이 났다. 그는 잘 아는 바와 같이 미야기현 이시마키시에 사는 산부인가 의사이다. 그는 낙태문제를 상담하러 온 손님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장하고, 태어난 아이들은, 아이를 필요로 하는 가정에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가는 부모에게는 그 아기가 그들의 친자식인 것으로 출생 증명서를 발행해 주었던 것이다.
  형사처분은 의사법 위반, 공정증서(公正證書) 부실기재 등이었고, 약식 기소에 의한 벌금형으로 결정되었다. 실형은 아니었지만 의사법 위반 때문에, 기쿠다씨는 의사생활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나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지하고 있었다. 나 개인으로서는 기쿠다 의사의 행위를 인간으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갖는 기쿠다 의사의 지지자도 적지 않다고 듣고 있다.
  나는 소설
빙점氷点에서 이 기쿠다 의사와 비슷한 조치를 여주인공인 요꼬에게 취하도록 설정했다. 요꼬는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아이로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곧 어떤 기관에 맡겨진다. 그 기관의 관계자인 산부인과 의사 다카키는, 이 요꼬를 즉각 입적시키지 않았다. 조만간 맞게 될 양부모의 친딸로서 입적시키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꼬는 태어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출생신고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설에 대하여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빙점처럼 무리한,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소설을 근래에 읽은 적이 없다. 그 일은 법치국가인 일본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을 쓸 때에, 나는 같은 교회의 신자인 판사보와 재판소에 근무하는 친구인 서기관, 그리고 영아원 등에 조언을 듣는 등 꽤 파고들어서 취재를 한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고 있는 줄 모르는 판사보는, “미우라 선생, 아이를 입양시키려구요?”라고 하며 이상할 정도로 열성인 내 질문에 반문까지 했었다. 그 평론가는 법치국가인 일본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해 버렸지만,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와 같은 경우는 결코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빙점을 쓸 때에 갖고 있던 내 윤리관과 기쿠다 의사의 윤리관은 어쩌면 그리도 공통점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어쨌든 간에 나는 지금 ‘법에 저촉되는 것이 반드시 죄인가’, ‘법도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고 싶은 것이다.
  수년 전, 나는 역사소설
호소가와 가라샤 부인을 썼다. 거기서 당시의 권력자 히데요시가 돌연 기독교 금지령을 내린 사실을 잠깐 취급했다. 맨 먼저, 다카야마라는 사람이 히데요시 앞에서 기독교를 버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다카야마는 진실한 신자였다. 하지만 금령을 어기게 되면, 그는 즉석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토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카야마는 기쁜 마음으로 모든 토지를 몰수당했노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나는 법률에는 아주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법률을 절대시하는 것보다 이 다카야마처럼 양심에 따르는 편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결론이 먼저 나와 버렸지만, 나는 아무래도 의아스럽다. 우리들은 법률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완전한 셈이 되는지가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낙태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일본에서는, 왜 이렇게 낙태를 허용하는 것일까? 모체에 아무런 지장도 없는데, 마치 지장이 있는 것처럼 임산부와 의사가 야합을 한다. 그리고 낙태를 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참으로 허용될 수 있는 방편일까? 낙태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뱃속의 아이를 죽이는 것이다.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어느 간호사가 말한 바 있지만,
‘갓 태어난 아이의 첫 호흡을 손으로 정지시키라는 의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될 때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는 것이다.
  
‘첫 호흡을 정지시킨다’라는 것은 모체 밖에 나온 생명을 빼앗는다는 말이다. ‘이런 잔혹한 일도 합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허용되어서 좋은 것일까?’ 도망칠 수도 없는 태아의 목숨을 빼앗고, 신생아의 목숨을 빼앗는 쪽이, 거짓 출생 증명서를 만드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해서 허용하는 것인가?
  기쿠다 의사도 산모의 요청대로 낙태시켰더라면 법에 저촉되지 않고 일생 동안 편안했을 것이다. 도대체 모체에 지장이 없는데 지장이 있다고 적는 거짓과 거짓 출생 증명서와는 어느 쪽이 더 죄가 클까?
 
 문제는 법률에의 저촉 여부보다 인간의 생명이 지켜지는 쪽에 우선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법률의 절대성보다도 인간 생명의 절대성이 앞서야 할 것 아닌가?  이 근본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낙태 천국인 일본이 탄생했고, 그것을 보아 넘길 수가 없었던 기쿠다 의사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⑪ ━ “ 사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

  1119일자 신문에, 한 가족 아홉 사람의 자살 기사가 나와 있다. 아홉 사람 중 둘은 6살과 1살이고, 나머지는 21살 이상의 어른이다. 7억원의 빚을 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 자살이라고는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게 빚을 지고 있는 아버지와 함께 죽으려 하였으니까, 오히려 동의(同意)의 자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하든, 일곱 사람의 어른들이 똑같이 죽을 마음이 되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을까?
  해마다
2만명이나 되는 자살자가 발생한다고 듣고 있다.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들을 향해, “죽을 각오로 하면, 뭔들 못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다. 평소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도 어떤 경우에도 죽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뉴스가 있던 이튿날 나는 다하라 요네꼬라고 하는 사람의 생활을 그린 텔레비젼 프로를 보았다. 그녀는
24년 전, 고교생 시절에 신주쿠 역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려 했었다.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두 다리와 왼쪽 손을 잃고, 오른손도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용케도 목숨은 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24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그 생활을 어떻게 상상할까? 어두운 얼굴을 하고 비뚤어진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만약 내가 그런 몸이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에, 어떠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다하라 요네꼬씨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밝았다. 이 세상에 그토록 밝은 얼굴을 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녀는 세 손가락뿐인 오른손으로 야채를 썰고, 다림질을 하고, 재봉틀을 돌렸다. 결코 보통 주부에 뒤지지 않게 무척 빠른 속도로 훌륭하게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강연에도 나간다. 그래서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녀에게는 두 딸이 있다. 딸들도 밝게 자라나, 지금은 미국에 유학을 가 있다. 남편은 기독교의 전도자이다. 이 남편은
24년전, 그녀가 두 다리와 두 손을 잃었을 적에, 그 병실을 방문하여 참을성 있게 격려해 주던 신학생이었다. 살아갈 소망을 잃고 공허로웠던 그녀에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싹텄고, 그리고 그것이 결실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부터 그녀는 변했다. 이 처녀와 그는 결혼했던 것이다.
  몸이 부자유한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도 투명하다 해야 좋을 정도로 밝은 그녀와 만나고 나면, 살 힘이 주어지고 격려가 된다. 그녀는 텔려비젼 화면에서 아침 기도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었다.

“하늘에 계시는 참된 하나님이시여, 오늘도 새로운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한테서 전화가 올는지, 누가 찾아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서로 알게 될 것을 생각하니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 주십시오.”

  말이 꼭 이렇지는 않았지만, 요약하면 이런 기도였다.
  그녀는 매일매일 그 날 자기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밝게 사랑을 가지고 교제하고자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 나는 감동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다하라 요네코씨가 그대로 죽었더라면, 지금의 다하라 요네꼬씨는 없을 거라고. 나도 또한
30년쯤 전에 오호츠크 해(海)에서 삶을 끝내려 했었다. 만약 그 때 끝냈더라면 나는 한 편의 소설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번까지
31권의 책을 냈지만, 나는 그 책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자살한 사람들이, 먄약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하면 어떤 인생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그 사람들의 또 다른 인생을 상상해 본다.
  자살할 때에는, 인간이란 살아 보았자 무의미한 것일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사는 기쁨 따위는 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살아나갈 힘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 죽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래서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죽는 것 외에 달리 살 길이 없는 것일까? 다하라 요네꼬씨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상황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살하려 했을 때에는 사지가 멀쩡했지만, 구해졌을 때에는 오른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인생은 기쁨에 넘치는 인생이 되었다.
  그것을 생각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다”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인간이 오만하다는 증거인 것이다. 길은 얼마든지 있다. 살려고 할 때에 길은 반드시 열리는 것이다.
  
“희망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⑫ ━ “ 어머니라는 것 ”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벌써 4개월이 되어 온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에 관하여 남에게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디에도 쓰고픈 생각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평생 건강하신 분이었다. 나와 함께 아사히야마의 동물원에 가서, 그 넒은 경내를 쉬지 않고 돌아다닐 정도였다. 내가 그 때에,
  “여기서 쉬어 가시지 않으시겠어요?”하면서 먼저 벤치에 털석 앉았더니,
  “왜? 하고 어머니는 의아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내가 다시 말하니까, 어머니는 웃으면서,
  “피곤해진건 엄마가 아니고 너다. 엄마는 이 정도로는 피곤해지지 않는다.”라고 해서 내가 그만 손을 들어 버렸던 것이다.
  평소 단체 여행으로 일본 각지를 두루 다니시는 어머니에게 동물원 일주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가볍게 보였던 병으로 입원했다가, 설사가 멈추지 않아 몸이 쇠약해졌고, 곧 뜻밖의 고혈압 증세가 나타나면서 의식 불명에 빠졌다. 그랬다가 그로부터 보름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입원한 어머니 자신도 우리들도, 어머니는 곧 퇴원해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더욱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시신을 앞에 두고 밤샘하는 자리에서 아사히가와 병원의 당번 의사는,
  “이성과 애정의 균형이 잡힌 보기 드문 여성이었습니다.”라고 애도의 말씀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7, 8년 전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동생은 전망이 좋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려오던 차에 치어서 사흘 만에 죽었다. 45세란 한창 나이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아직 중학생과 고등학생, 말하자면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나이의 아들 둘을 남겨 놓고 그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동생은 효성이 지극한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 동생이 차에 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즉사는 아니었다. 가해자는 우리 가족들, 친척들과 함께, 동생의 수술 후의 상황을 염려하면서 병원의 의자에서 밤을 밝혔다.
  어머니는 소리를 죽여 가며 울고 계셨는데, 모두가 아침밥을 먹는다고 식당에 가자 비틀거리며 일어나셨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다가갔다. 나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러 가시는가 생각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곧 내 곁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 하러 가셨댔어요?”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 아침밥을 먹었느냐고 물어 보고 왔어.”
  나는 놀라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속도 위반으로 치어 놓은 가해자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어머니는 물었다.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미
70대 중반을 지난 연세였다. 사랑하는 아들을 친 가해자에게 밉다고 정신없이 대든다 해도 이해되는 연세였다. 어머니는 놀라는 나에게 말했다.

“차에 치인 아키오는 물론 불쌍하지. 하지만 말이다, 사고를 낸 운전사도, 만약 아키오가 죽으면 배상금을 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중소기업인이라고 하니까, 돈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을 것 아니냐? 과실이야 과실이지만, 돈 형편을 생각하느라고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불쌍했단다.”

  어머니는 진지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한 주일 전에도 속도 위반으로 운행 정지조치를 받았었다는 그 사람의 부주의한 운전에 부아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나의 형제, 친척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더욱 복도의 한쪽 구석에 풀이 죽은 채 넋을 잃고 앉아 있는 가해자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에 어머니에게는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말을 걸어 준 것을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감사했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산다고 해도,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 식사했나요?”하고 가해자를 향해 말할 수 있는 인간은 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와 같은 사랑과 이성은, 전적으로 천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결혼식의 피로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모두 선물을 싼 보자기를 갖고 오지 않니?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누구의 결혼식인지는 모르지만서도, 아무튼 행복했으면 하고 이 에미는 생각한다.”

  어머니란 자기 자식뿐만 아니고, 어느 틈엔지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까지 사랑을 미치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아이가 없는 나는 어머니의 이 말을 듣고 두고두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미우라 아야꼬/『 고독에도 손길이 』...

 『 법률보다 중요한 것 ... 』(에세이 모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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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에도 손길이 」/미우라 아야꼬 지음.

(잠 언 8:323616:622:4고린도후서 3:17

 33 ○ 그러므로 오 너희 자녀들아, 이제 내게 경청하라. 내 길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느니라. 33 훈계를 듣고 현명하게 되며, 그것을 거절하지 말라. 34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나의 문들에서 지켜보고 나의 문설주들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이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생명을 얻고 의 은총을 받을 것임이니라. 36 그러나 나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치는 자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16:6 ○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22:4 ○ 겸손함과 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부와 명예와 생명이 있느니라. 3:17 이제 는 그 영이시니 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3:17 Now the Lord is that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eth; the flesh profiteth nothing: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 14:24 만군의 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것을 행하리니 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14:24 The LORD of hosts hath sworn, saying, Surely as I have thought, so shall it come to pass; and as I have purposed, so shall it stand: 4:12 Therefore thus will I do unto thee, O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unto thee, prepare to meet thy God, O Israel.

(이사야 14:24아모스 4:12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