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5. 12:32

“ 세상 조직 뒤에 숨어 사는 악령 ” (진리의 지식)

(진리의 지식) [20140905]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 세상 조직 뒤에 숨어 사는 악령

 글자크기를 조정하는 방법ː[Ctrl]를 누르고, [마우스 휠] 또는 [╋/━]

【 주께 영광을ㆍGLORY TO THE LORD 】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장ː세상 조직 뒤에 숨어 사는 악령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리라. 32 또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오리라.”...』(요한복음 12:31, 32)하는 말씀을 우리 주님은 그의 사역의 핵심으로 여기셨다. 그는 열광적인 무리의 옹위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야 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으며, 또한 하늘을 향해 사람들 앞에서 이 사실을 천명하기도 했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말씀을 통하여 그의 의도를 나타내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예수님을 만나 보고자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그를 모시고 집으로 초대할 만큼 박수갈채를 보내던 그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그 죽음에 대한 암시가 과연 어떻게 전달되어졌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그 무리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파악했더라면 틀림없이 그들의 소망은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를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예수님은 실제로 한 죄인의 신분으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33절).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들이 품고 있던 한 가닥의 환상을 진정으로 깨뜨려 버렸다면, 그 환상 대신에 오히려 더 굳건하고 안전하며 커다란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 애국자들이 추구하던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지배권의 변화를 선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라는 표현은 그 앞서 있었던 말과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통치자인 그리스도의 원수와 그리스도가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밀알로서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강제와 공포의 이 세상 통치는 거만한 세상 통치자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하여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의(義)의 새로운 통치가 들어올 것이다. 이 새로운 통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헌신이 특징이다.
사랑의 끈으로 묶인 그들의 마음은 심판 아래 처한 세상을 떠나 인자이신 예수님에게로 이끌려갈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들림을 받아 죽으셨지만 바로 그 행위로 인하여 들림을 받아 다스리게 되셨다.
  “땅”은 이 위기와 그것의 엄청난 결과가 나타나는 무대이며, 소위 “이 세상”이라는 것은 이 위기의 최후 충돌점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다룰 이 책의 주제이며, 이와 관련하여 “세상”이라는 중요한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의 신약적 개념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영어에서는 이 코스모스(세상)가 단 한번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세상”으로 번역되어 있다.에이온(aion)이라는 헬라어도 역시 세상이라고 번역되지만, 시간에 대한 관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므로 “때”(시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시간을 들여서라도 신약 헬라어 사전을 한번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림(Grimm)의 신약 헬라어 사전을 보면 성경에서 코스모스가 얼마나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고대 헬라어에서 그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그 단어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알게 된다. 첫째는
조화를 이룬 질서 또는 배열이며, 둘째는 꾸밈 또는 장식이다. 후자의 경우는 신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즉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단장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전을 아름다운 돌로 꾸미거나 또는 신랑을 위해서 신부를 예쁘게 단장하는 경우를 말한다(눅 21:5/계 21:2). 베드로전서 3:3에서는 이 단어가 이례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즉 이 코스모스가 5절의 kosmeo란 동사와 같이 “단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1) 고대 헬라어에서 신약의 저자들에게 눈을 돌릴 때 우리는 그들이 사용한 코스모스의 의미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물질적인 우주, 온 세계, 이 땅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7:24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라 했으며, 마태복음 13:35에는 “세상”이라 했으며, 요한복음 1:10에는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라고 했으며, 마가복음 16:15에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라고 했다.
  (2) 코스모스의 두번째 용법은 이중적이다.
  ① 요한복음 1:10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3:16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12:19의 “보라, 세상이 그를 따라가는도다”, 17:21의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때, 구절 속에 나타난 세상은
세상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② 이 용법을 좀더 확장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결국 그리스도까지 대적하는 모든 인류의 개념이 된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38에서는 “세상은 그들이 살 만한 데가 못되었으므로”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4:17에서는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라고 하였고, 14:27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했으며, 15:18에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세번째로 코스모스가 성경에서 세상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사라는 것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허무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결국은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되고 마는 세상의 물질, 재산, 부, 특권, 쾌락을 총칭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한일서 2:15 ─ “세상에 있는 것들”, 3:17 ─ “세상의 재물” , 마태복음 16:26 ─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고린도전서 7:31 ─ “이 세상을 이용하는 자들은 다 이용하지 못할 것처럼 하라.” 코스모스에 관한 이와 같은 용법은 비단 물질적인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혹은 비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추상적인 것에도 적용된다.
  이에 관한 예를 살펴보자. 고린도전서 2:12 ─ “세상의 영”, 3:19 ─ “이 세상 지혜”, 7:31 ─ “세상의 형체”, 디도서 2:12 ─ “세상 정욕들”(여기서는 코스모스가 형용사형인 코스믹코스로 되어 있음), 베드로후서 1:4 ─ “세상에 있게 된 타락”, 2:20 ─ “세상의 오염”, 요한일서 2:16, 17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정욕과...자랑이요,...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야고보서 1:27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 없이 지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구절들을 보아,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코스모스가 사도 요한이 매우 즐겨 쓰던 용어였다는 사실과 또한 그의 도움으로 지금 우리가 좀더 발전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의 세 가지 정의가 (1) 물질적인 지구 또는 우주, (2) 지상의 사람들, (3) 전체적인 것에 각각 무언가 기여하고 있는 세상사들이라면,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그 이상의 것이 도사리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질서적인 배열 또는 조직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은 우리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그 모든 유형적인 것들의 배후에 있는 무형의 어떤 것을 만나게 되며, 계획된 조직을 대면하게 된다. 이 조직 속에는 조화를 이룬 기능, 즉 완전한 질서가 있다.
  이 조직에 대해서 강조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속으로 악이 침투할 수 있도록 죄를 범했던 그 날 이래로,
세상의 질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왔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며”(고전 1:21), 그리스도를 “미워했으며”(요 15:18), 진리의 영을 “영접할 수 없었다”(요 14:17). “세상의 일들은 악하다”(요 7:7).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약 4:4).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요 18:36). 그는 “세상을 이기셨으며”(요 16:33),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 요한복음 12:31, 32을 통하여 이 글의 서두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확고부동하시다.
  둘째로, 같은 구절들이
세상의 조직 뒤에 악령이 숨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호한 것이다. 요한은 “이 세상의 통치자”에 관하여 여러 번 언급했으며(요 12:31, 14:30, 16:11), 그의 서신에서는 그 통치자를 설명하기를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고 했다(요일 4:3). 또한 그는 그 통치자와 신자들 속에 거하시는 진리의 영을 대치시켰으며, “온 세상은 악함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요일 5:19). 그 악한 자란 반항하는 코스모크라토르(kosmokrator-세상 주관자)이다. 이 용어는 성경에 단 한번 나타나 있지만, 복수형으로 쓰여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로 되어 있다(엡 6:12).
  그런즉 질서 있는 조직, 곧 “세상”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뒤에 숨어서 조정하는 주관자, 사탄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2:31에서 예수님께서 심판의 선고를 이 세상에 내리셨을 때, 물질적인 세상이나 또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장차 올 것이다. 지금 여기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탄 자신이 창시해서 그 머리가 된 제도, 곧 조화로운 세상의 체계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분명히 밝히셨듯이, 그는 심판을 받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며(요 16:11), 보좌에서 물러나 영원히 “쫓겨남을 받은” 자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상에 대하여 좀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준다. 만약 우리가 물질적인 것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보지 못한다면, 아주 쉽게 속임수에 넘어갈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깊이 고찰함으로써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암시하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의 구절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는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거나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kosmos)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고요한 영으로 단장할지니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이니라.”(벧전 3:3)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악령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며 썩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베드로의 말의 진정한 가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베드로의 가치관을 즉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배척할 수도 있다. 옷을 화려하게 입고 보석을 차거나 또는 과분하게 치장하는 문제의 배후에는 어떤 목적을 두고 활동하는 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가 뜻하는 바이다. 당신은 그 음흉한 세력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로 이런 세상적인 것들에 대하여 반응하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이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색조와 조화를 살려 미적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본질적으로 잘못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접촉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몸서리치게도 우리는 지금 가시적인 사물의 배후에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조직, 하나님의 원수가 관할하고 있는 그 조직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사로 시작된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의미의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살펴보면 “세상”의 의미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다. 비록 구약의 시편이나 예언서에서 세상의 영적 의미가 조금씩 나타나기는 하지만, 신약에 와서야 “세상”이 완전한 영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왜 “세상”의 의미가 성경 속에서 발전해 왔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 세상은 오직 땅이란 의미와 땅 위에 거하는 인간 또는 땅 위에 있는 사물이란 의미로만 존재해 왔었다. 아직까지 조직화된 질서(체계)로서의 코스모스, 곧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과 더불어 사탄은 이 땅 위에 자기가 고안해낸 질서를 가지고 들어왔으며, 그것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조직을 세웠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물질적인 땅은 사탄의 조직을 의미하는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또한 인간도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의 범죄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열려진 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조직을 이 세상에 들여놓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 땅은 “세상”안에 있었고, 인간도 역시 그 “세상”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타락 전에는 땅이 있었고, 타락 후에는 “세상”이 있었고, 주님의 재림 때에는 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이 사탄에게 속한 것같이 왕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뿐만 아니라, 그 왕국은 세상의 주관자들을 내어 쫓고 있으며 앞으로도 내어 쫓아 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하여 들어설 것이다.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산에서 떨어져 나간 돌이” 사람의 거만한 형상을 산산이 부셔 버릴 때,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될 것이다”(단 2:44, 45┃계 11:15).
  정치, 교육, 문학, 과학, 예술, 법률, 상업, 음악 - 이런 것들이 코스모스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또 이런 것들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것들을 없애 보라, 그리하면 하나의 밀착된 조직으로서의 세상은 온데 간데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이 모든 분야에 특이할 만한 진보를 거듭해 왔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런 진보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서 그의 나라를 이 세상 안에 세울 것이다(요일 2:18, 22/4:3┃요이 7절┃계 13장).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발전의 방향이다. 사탄은 물질적인 세상,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세상 속에 있는 사물들을 이용해서 결국 적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바로 그 때에 세상 조직은 최절정에 이를 것이요, 또 바로 그 때에 세상 조직을 이루고 있던 하나하나의 부분이 적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 동산 안에서 과학 기술에 대한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거니와, 또 기계적인 도구에 관한 언급도 전혀 없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카인의 자손들 가운데서 놋과 쇠로 연장을 만드는 쇠붙이공이 있었다. 오랜 동안 칼과 보습이 공공연하게 경쟁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철로 된 도구를 보고 적그리스도의 영을 알아낸다는 것은 너무도 공상적인 판단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손에 놓여 있는 금속은 흉악하고 잔인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결국 기술과 공학의 겉잡을 수 없는 남용은 더욱더 두드러지게 그 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음악과 예술에도 적용된다. 현악기와 오르간도 카인의 가문에서 나왔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놓인 이 악기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본성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세계 여러 곳에서 회화, 조각, 음악의 예술과 우상 숭배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나타냈다. 의심할 것도 없이 적그리스도의 본성이 드러날 날이 올 것인데, 그 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음악과 춤과 연극 등의 가시적인 예술을 통해서 더 공개적으로 드러날 것이다(노래와 춤이 우상숭배에 붙어 다니는 사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상업에 대해서도 한번 살펴보자. 사탄과 상업의 관계는 훨씬 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사탄은 최초의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기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이브에게 사상을 상품으로 팔아먹었다. 에스겔서 28장에 나오는 비유적인 언어를 보면 사탄의 본성에 관해 암시하는 바가 있다.
“네 큰 지혜와 네 교역으로 네가 재물을 늘렸으며 네 마음이 네 재물로 인하여 높아졌도다”(5절). 우리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사탄이 조정하는 상업의 근원과 성격을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가? 교육은 조금도 해로울 것이 없노라고 우리는 분명히 주장할 것이다. 어쨌든 자녀들은 합당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면, 교육이라는 것도 상업이나 기술에 못지 않게 세상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교육은 지식이라는 나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분명히 드러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는가? 그러나 자녀에게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근본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접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커다란 세상의 조직과 위험으로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학은 어떠한가? 과학 또한
코스모스를 이루고 있는 한 단위이다. 과학도 지식이다. 과학에 좀더 깊숙이 들어가서 물질적인 세계의 본질 - 그리고 인간의 본질 - 에 관해서 사색하노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ː과학적인 연구와 발견의 추구는 어느 한도까지 적절한 것인가?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이롭고 어디까지가 해로운가?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추구하면서 사탄의 올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나의 이러한 주장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장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핵심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요일 2:15). 궁극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들에 접할 때에, 언제나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하는 질문이 있다. “이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우리가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때는 지났다. 오늘날에는 세상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찾아낸다.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지금 넓게 퍼져 있다. 당신은 세상의 힘을 지금만큼 강하게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돈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만큼 많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음식과 의복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디를 가든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의 대화에서도 세상사가 주된 화제가 된다. 세상은 바로 교회 문전까지 다가와 하나님의 성도들까지 삼키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영역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십자가의 능력을 잘 알아야 한다.
  전에 우리는 죄와 육신적인 삶에 대해서 많이 언급했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영적인 문제들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우리가 세상과 접촉할 때에 동일하게 중요한 영적 문제가 결부된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무대 뒤에는 영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1을 수단으로 하여 그 영의 세력은 사람들을 그의 조직 속으로 속박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들이 경계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은, 다만 죄에 대하여 대항하자는 것뿐 아니라, 이 세상 통치자에 대하여 대항하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가 도래할 때 그가 세우신 교회의 완성을 보고자 하신다. 이에 맞서 하나님의 대적도 엉터리로 모방해서 이 세상 조직(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대한 모조품)을 만들어 놓고 적그리스도가 통치할 때 최절정에 올리려고 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탄을 도와 그 불운한 사탄의 왕국 건설에 동참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하여야 한다. 우리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때 스스로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 선하냐 악하냐? 이것이 유익하냐 해로우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질문보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우주 안에는 이 한 가지 갈등만이 존재하므로, 두 가지 상반되는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때마다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하는 것이다.

────────────────────────────────
   
웟치만 니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ː제1장 』 ...
────────────────────────────────

LOVE NOT THE WORLD
by
Watchman Nee

Copyright ⓒ Angus I. Kinnear 1968
Published by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 USA.
1972, 2001Korean by Word of Life Press, Seoul, Korea.
All right reserved

Translated and published by permission.
Printed in Korea.

1장ː세상 조직 뒤에 숨어 사는 악령

Bible believers

─────────────────────────────────────────────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