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있으리라! 천국을 닫아버리는 자들이여! ” (바른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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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있으리라! 천국을 닫아버리는 자들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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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개인적으로 오늘 화두인 묵시문학적인 표현대로 예수가 천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는 그런 종말은 안믿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이 지은 모든 범죄보다도 더 크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 때문에 이 지구수백 억 년 역사 동안 당신이 애써 농사지어온 이 농사밭에 불을 질러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나는 믿지를 않아요. 그런 신앙관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앙에 대한 배반입니다. 」 ─ 김경재 한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 2000년
신약 교회의 역사상 “무천년이냐
혹은 후천년이냐와 전천년이냐”라는
논쟁만큼 고전적인 논쟁도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목격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곧 다시
오마’ 약속하시고
하늘로 들려올라가신 구주께서 과연 언제, 또 어떤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인가? 라는 물음은 단 한시도 중단됨없이 지속되어온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김형기씨가 편집장으로
있고, 한국신학사상사에서 발간하는 계간〈신학사상〉은
지난 계절 호인 제104호에서 밀레니엄 특집으로「종말:상징인가, 현실인가?」라는 기사를 마련하면서 마치 무천년주의 종말론
신앙이 성경적 진리인 양 옹호하고 나섰다.〈신학사상〉은 성서신학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정평이 있는 신학잡지로, 사당동 총신에서 발간하는
월간〈神學指南ㆍ신학지남〉과 함께 우리나라의 신구약 학계를 대표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전문 학술지 중의 하나이다. 먼저 이번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김경재 교수는 정양모 교수에게〈신학사상〉을
위해 수고한 그간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이어 몰트만(2)의〈희망의
신학〉과 관련해
현대 카톨릭 신학의 조류에 관해 질문을 하였다. 「 한데 예수님이 이승을 떠나고 거의 1900년 이상이 흘렀지만 기다리게 해놓고 오신다는 양반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이미 1900년에 파리 카톨릭대학 성서학자 알프레드 르와즈라는 사람이 신약성서를 면밀히 연구해보니까 예수님 조차도 종말 임박사상에 젖어있던 분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시한부 종말론의 종말시한이라는 것이 이미 예수님 말씀에 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도 속은 것이 아니냐 이 문제가 제기된단 말이예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저는 개인적으로는 ‘히브리서 4:15’에서 찾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인간의 약점을 고스란히 체험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할 수 있는 분이다... 죄 짓는 일 말고는 우리 여느 인간과 똑같았다는 거죠. 여느 인간의 약점이 뭡니까? 약점의 한 가지가 무지 아닙니까? 예수님도 무지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봐요. 」(pp.7, 8) 정교수는 이 말을 한편으로 풀어서 설명하기를 “예수님도 ‘마가복음 9:1/13:30┃마태복음 10:3’에 따라 임박한 종말을 설파하셨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시한부적으로 열망하였던 당시 사도들은 예수님의 무지에 희생당하였다.”고 바꾸어 말하였다. 이어서 성공회대 신약학 교수로 있는 최영실 교수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이 묘사한 종말은 그 당대에서 이미 성취되어진 일들로,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하듯이 물이 피빛으로 변하거나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야기는 한낱 지어낸 설화라고 못박았다(p.10).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하느님의 나라는 유대교에서 말하듯이 죽은 후의 어떤 세계나 장소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행위와 더불어 이미 왔습니다.”(p.11)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사후에 성취될 유토피아가 아닌 교회를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어지고 있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아마 최교수는 마태복음의 언어를 빌려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됐다고 말하려 했던 것같지만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탓에 표현이 좀 어설프게 되고 만 것이다. 사회자인 김경재 교수는 발제자들의 의견에 찬성하며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이장림 휴거파와 같은 사이비 종말론이 판을 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내비추며 성경의 영감성 자체를 의문시하였다. 「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성서의 묵시문학이 모년 모월 모시에 와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 쓸어 없애버린다는 어떤 비밀 정보성격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천기를 누설하는 천계의 ‘정보자료’ 집성물로써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절망적 종말론을 보다 밝은 미래를 지향해 가는 희망의 종말론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돌아가면서 말씀해 주십시오. 」(p.25) 말을 이어받은 협성 대학교 역사신학 한정애 교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은 교회사를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을 이겨내고 매순간 위로와 소망이 된 것이 사실이며 무엇보다 세계 오지의 선교를 하는 데 임박한 종말론이 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겠으나, 제칠일 안식재림교와 같은 이단을 생겨나게 했다고 비판하였다. 「 우리가 교회사를 살펴볼 때 세계 선교가 성서의 내용을 근본주의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있을 징후로 예수가 재림하고, 마귀가 묶임을 당하고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여러 징후들에 대해서 표상을 했는데, 이것이 실제로 정보로서 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종말론 사고에 결정적인 역할은 못했습니다. 아우구스틴도 ‘천 년이라는 수는 문자적인 수가 아니라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지 특별한 시기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천년왕국을 극복하죠... 성서를 근본주의적,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을 것이고요, 제칠일 안식재림교도 이러한 서유럽의 계몽주의를 대적하는 맥락에서 생겨난 아메리칸적-말세론적 종파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것은 그 계시록 20장이나 다른 몇 군데만 언급되는 이것을 분리시켜 문자적으로 직역하며 시대에 맞게 해석을 만들어 내고 종말론을 만들어냈잖아요? 」(p.30) 역사신학자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함량미달의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적어도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무천년주의와 후천년주의는 전천년주의 신앙에 비해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반전천년주의 신앙은 그것이 후천년교리든 무천년교리이든 정통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어 이들은 토의를 맺어가며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정리했다. 정교수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 저는 역사의 종말,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자면 생각을 포기하는 입장입니다... 우주의 종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보다 제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 생각이 점점 깊어져요.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팔자소관이 같을 수밖에 없는 거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젖은 이 양반이 처참하게 돌아가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거두어가셨듯이 제 죽음도 예수님 죽음만은 못하더라도 참 비극적으로 끝날 것이다라는 생각이죠... 육신이 부활할 것을 믿나이다. 그것조차도 다 희망의 상징이요, 꿈이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툭툭 털고 일어나 뼈다귀가 조립이 되고 하는 그런 것이 다 묵시문학적인 발상인 것이죠.. 아마 모르겠습니다, 이럴 적에는 불트만(3)이 살아있으면 퍽 좋아 할지요? 」(p.35) 결국 사회자가 이 심포지엄에서 신학자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를 정리하는 말에서 이번 특집기사에 대한 신학사상의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 오늘 연구소에서 내놓은 화두 ‘종말, 그것은 상징인가 현실인가’에 대해서 잠정적 판단을 내려봐야겠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소위 말하는 뉴톤적 물리학 세계관이든지 고대 삼층천적인 프톨레미 우주관을 밑바닥에 깔아놓고서든지, 시공 좌표상의 모년 모월 모시에 예수가 세상을 파국과 재난으로 몰아가면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신다는(계 19장) 그런 종말묘사는 ‘문자적 현실’이 아니라 ‘묵시문학적인 상징표현이다’라는 결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신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정치적 경제적 환란과 도덕적 가치규범이 혼란상태로 빠져버린 오늘의 상황에서, 지구 전체가 생태학적 파멸 속에로 빠져 들어갈 위기시대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나무’를 심어가자는 뜻을 굳게 다지는 것이 종말신앙의 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p.39)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신학사는
근자의 이야기 신학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비판하고 도단하는 곳에 소비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타협과 관용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어 결코 진리에 관해서는 말하려 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입을 열 뿐이다. 위에 인용된 글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 있듯이 오늘날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들을
양성한다는 신학교의 교수진들이 성경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라타고 앉아서 말씀을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것을 아무 거리낌없이
자행하는, 불신으로 가득 찬 학자 집단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떤 얼빠진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깎아내리고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데 자신의 노력과 온 지성을 허비하는 방종한 신학자들을 교회의
헌금으로 먹여 살릴 의향이 있겠는가? 이들은 마치 옛 북이스라엘의
혼란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된 평화만을 외쳤던 거짓선지자 하나냐와
같이(예레미야 28장) ‘희망의 신학, 희망의 미래’만을 역설할 뿐, 정작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심판석”(the
judgment seat of Christ)을 준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해야 될 불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무서운 심판과 파국을 볼 수 없도록 덮어버리는 것이다. 『 주의
날을 바라는 너희에게 화로다! 그것이 너희에게 어떤 결말이 되겠느냐? ┃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No. 93/1999-12) ... ┃
【 주(註) 】 (1) 어거스틴은 자신의 저서〈하나님의 도성ㆍCity of God(XX, 7∼9)〉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6번에 걸쳐 언급되어 있는 “천 년”이라는 숫자가 문자적인 황금기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완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무리수이다.”라는 해석학적인 전제를 달고 출발하여 신구약 전체의 종말의 계시를 풍유적으로 풀어나갔던 것이다. (2) 유대인 맑스주의 철학자 블로흐(Ernst Bloch)의 영향을 받은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의 저서〈희망의 신학ㆍTheology of Hope〉에서 종말을 단순한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지금 여기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3) 칼바르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유명한 신약성서학자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ㆍ1884∼1976)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비신화화론(demythologizing)이라는 새로운 해석학적인 방법론을 주창한 인물이다. 비신화화론이란 뜻 그대로 성서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대신 현대라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말씀의 신화를 제거하고 읽는 것을 말한다. 불트만의 이같은 종교사학(宗敎史學)적인 주장은 전 감신대 총장이었던 변선환 박사의 종교다원주의 이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서 8:19) (예레미야 6:1∼30) 『 1 ○ 오 너희 베냐민 자손들아, 모여서 예루살렘 중심으로부터 도피하라. 트코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케렘에서 봉화를 세우라. 이는 재앙과 큰 멸망이 북쪽에서 나타남이라. 2 내가 시온의 딸을 아름답고 섬세한 한 여인에 비유하였으니 3 목자들이 그들의 양떼와 더불어 그녀에게 올 것이요, 그들은 그들의 장막을 그녀 주위에 칠 것이며 그들은 자기 처소에서 모든 양떼를 먹이리라. 4 너희는 그녀를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라. 일어나서 정오에 올라가자. 우리에게 화로다! 이는 낮이 다 가고 저녁 그늘이 펼쳐짐이라. 5 일어나 밤에 가서 그녀의 궁전들을 파괴하자. 6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토루를 쌓으라. 이 성읍은 벌받은 성읍이라. 그녀의 중심에는 온통 압제뿐이라. 7 마치 샘이 그 물을 솟구쳐 내듯이 그녀도 그녀의 사악함을 내뿜으니 폭력과 탈취가 그녀에게서 들리며 슬픔과 상처들이 내 앞에 계속 있도다. 8 오 예루살렘아,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여 내 혼이 너를 떠나지 않게 하며 내가 너로 황폐케 하여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만들지 않게 하라. 9 ○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포도같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샅샅이 주우리니 광주리에 포도를 따는 자같이 네 손을 돌이키라. 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고를 주어야 듣겠느냐? 보라, 그들의 귀는 할례받지 않았으니 그들이 경청하지 못하는도다. 보라, 주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꾸짖음이니 그들이 말씀 속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주의 분노로 가득 차 견디기에 지쳤도다. 내가 그것을 밖에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의 모임에 함께 부으리니 남편이 아내와 더불어 잡혀갈 것이며 노인들은 날 수가 찬 자와 함께 잡혀가리라. 12 그들의 집들이 그들의 밭과 아내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갈 것이니 이는 내가 내 손을 그 땅의 거민들 위에 펼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 13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탐욕에 빠졌고 선지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거짓되이 행하기 때문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 말하기를 “화평이라, 화평이라.” 하나 거기에는 화평이 없도다. 15 그들이 가증한 짓을 범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며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러지는 자들 가운데 쓰러지리라. 그 때에 내가 그들을 감찰하리니 그들이 던져지리라. 주가 말하노라. 16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길에 서서 보고 옛 길, 그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 그곳으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하여 쉼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그곳으로 걸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7 내가 또한 너희 위에 파수꾼들을 세우고 말하기를 “나팔 소리에 귀기울이라.” 하였으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귀기울이지 않겠노라.” 하였느니라. 18 ○ 그러므로 너희 민족들아, 들으라. 오 회중아, 그들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 알라. 19 오 땅아, 들으라. 보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니, 곧 그들의 생각의 열매라. 이는 그들이 내 말들과 내 법에 경청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라. 20 무슨 목적으로 시바에서 향을, 먼 나라에서 향품을 내게 가져오느냐? 너희의 번제는 받아들일 만하지 않으며 너희의 희생제는 내게 향기롭지 아니하도다. 21 그러므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치는 것을 두리니 아비들과 아들들이 함께 그것들 위에 넘어지며 그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22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한 백성이 북쪽 나라에서 오나니 한 큰 민족이 땅의 사면에서 일어나리라. 23 그들이 활과 창을 잡을 것이라. 그들은 잔인하고 자비가 없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바다같이 포효하는도다. 또 그들은 말을 타고 너를 대적하여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대열을 짜는도다, 오 시온의 딸아. 24 우리가 그 명성을 들었으니 우리의 손에 힘이 없어지고 괴로움이 우리를 붙들었으며 진통하는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우리를 붙들었도다. 25 너희는 밭에도 가지 말고 길로도 걷지 말라. 이는 원수의 칼과 두려움이 사방에 있음이라. 26 ○ 오 내 백성의 딸아, 굵은 베옷으로 두르고 재 속에서 뒹굴라. 가장 비통한 애가로 애곡하되 독자를 위하여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멸망시키는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임할 것임이라. 27 내가 너로 내 백성 가운데 망대와 요새로 세워 너로 그들의 길을 알게 하고 살피게 하였노라. 28 그들은 다 심한 배역자들이며 비방을 일삼고 다니는 자들이라. 그들은 놋과 철이며 그들은 다 부패한 자들이라. 29 풀무들이 불타고 납이 그 불에 살라지나 녹이는 자가 헛되이 녹이는도다. 이는 악한 자들이 뽑혀지지 않음이라. 30 사람들이 그들을 버림받은 은이라 부르나니 이는 주가 그들을 거부하셨음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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