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3. 21:17

“ 부패한 양심 ” (설교 모음)

(설교 모음) ● [20050619] 부패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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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패한 양심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 Charles Grandison Finneyㆍ1792∼1875

찰스 G.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17921875) ━

“ 율법이야말로 진정하고도 유일한 도덕 기준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로마서 320b). 율법은 인간의 양심을 흔들어 깨웁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율법이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양심의 타락은 그만큼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사역자들에게 청교도 정신을 비웃고, 거룩한 율법으로 양심에 찔림을 주는 작업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해보십시오. 도덕적 자각을 일으키는 청중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회의 양심이 이토록 부패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강단의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양심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덕적인 율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너무나 팽배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목사들 중 몇몇은 ‘골상학자’들입니다. 골상학은 한물 간 학문인데, 골상학자들은 두개골의 형태를 연구하여, 정신 능력과 성격 특성 등을 분석하고 규정짓습니다. 골상학에는 “자유 의지”(
Free-will)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론 속에는 도덕적 주체나 도덕 법칙, 혹은 도덕적 의무를 나타낼 만한 적당한 용어가 없습니다. 골상학자들은 도덕적 의무라든가 도덕적 법칙, 책망, 혹은 심판에 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

─ 본문 중에서... ─

『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For whatsoever is born of God overcometh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overcometh the world, even our faith.
 』

(요한일서 5:4

  40년 전과 지금 상황을 가만히 비교해 보자면,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확연하게 많아졌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풍조를 걱정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가식적이고 거만하며 극악해진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하는 불평을 던집니다. 왜 이런 타락이 일어났겠습니까? 물론 이유를 대라면 여러 가지 직, 간접적인 이유를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무엇보다 목사들과 출판사들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수년간 청교도 정신을 비난하고 비웃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사람들의 양심을 자극하는 설교를 하는 목사들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숙고해 보라는 강력한 권고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시도가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율법이야말로 진정하고도 유일한 도덕 기준입니다.『...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로마서 320b). 율법은 인간의 양심을 흔들어 깨웁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율법이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양심의 타락은 그만큼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사역자들에게 청교도 정신을 비웃고, 거룩한 율법으로 양심에 찔림을 주는 작업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해보십시오. 도덕적 자각을 일으키는 청중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회의 양심이 이토록 부패한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강단의 설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양심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덕적인 율법에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너무나 팽배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목사들 중 몇몇은
‘골상학자’들입니다. 골상학은 한물 간 학문인데, 골상학자들은 두개골의 형태를 연구하여, 정신 능력과 성격 특성 등을 분석하고 규정짓습니다. 골상학에는 “자유 의지”(Free-will)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론 속에는 도덕적 주체나 도덕 법칙, 혹은 도덕적 의무를 나타낼 만한 적당한 용어가 없습니다. 골상학자들은 도덕적 의무라든가 도덕적 법칙, 책망, 혹은 심판에 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몇 해 전, 어느 유명한 설교자의 동생이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고린도후서 520b)는 성경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었는데, 그는 하나님과의 화해에는 율법을 단념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말을 넌지시 던졌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있은 다음 날 저를 방문해서 하는 말이,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은 (그들은 모두 목사였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전혀 무시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니, 죄악이니, 공의니 그리고 심판이니 하는 말 따위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릴 아버지 세대나 당신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린 이 부분에 관해 당신이 설교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덧붙이기를, “전 양심을 예민하게 만드는 짓 따위는 그만뒀습니다. 그랬더니 양심이 뭔지를 드디어 알기 시작한 것 같더군요. 우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 명의 형제 목사들은 여러 지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글을 종종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늘 같은 말만 되풀이 하더군요. 저는 그가 설교와 저술에서 양심을 빼버린 것을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알고 보니 그는 골상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유 의지도 없고, 도덕적 주체도 등장하지 않으며, 자유 의지를 사용하거나 도덕률을 실행함으로 얻어지는 결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해괴한 이론에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청교도 정신과 위대한 믿음의 교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그의 이단적 교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의 도덕적 분별력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알게 되는데, 저는 그럴 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그의 저술로 보아 그의 마음 속에는 도덕적 타락이라든가 죄악 그리고 보응 같은 단어들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는 듯 했습니다. 골상학자라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들은 마음 속에서 그런 죄악된 이론을 반드시 몰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골상학이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의 마음을 오염시켜 놓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수의 설교자들이 그들의 저작이나 설교에서 공중의 양심에까지 손길을 뻗는데 실패하고 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회중들이 가진 문제의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도덕률에 순종하라고 권고를 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로마서 331a)는 말씀에 주목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도덕률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신 ‘산상설교’에서 보여주신 기준들과는 다른 기준들을 붙들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구원의 증거가 거룩한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거룩한 삶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덕률 페기론자들이 지상에 만연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진정한 믿음은 도덕률의 준수를 불러옵니다. 다음의 네 가지가 (신약성경에 제시된) 진정한 믿음을 증명하는 사항들입니다.

● 진정한 믿음은 율법을 세운다(로마서 3:31).
●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갈라디아서 5:6).
● 진정한 믿음은 마음을 정결케 한다
(사도행전 15:9).
● 진정한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
(요한일서 5:4).

  삶의 법칙으로 그리스도의 도덕률이 전파되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기란 어렵습니다. 만일 도덕률을 빼놓고 설교하는 강단이 있다면, 그 앞에 앉아서 그런 어설픈 설교를 들으며 양심의 찔림을 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강단에는 좀 더 많은 “천둥의 아들들”(마가복음 317)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율법을 벼락처럼 떨어뜨려서, 그 마음에 번쩍하는 양심의 자각이 일어나도록 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강단에 더욱더 투철한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설교자가 등장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는 다소 과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교자 아래서 배웠던 사람들의 양심 상태는 지금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정부의 위대한 대변인이었던, 구닥다리에다 완고하기까지 한 그런 설교자들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도덕률 중 어느 하나라도 오늘날의 청중들처럼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목도했다면, 그들은 아마 강단이 으스러질 때까지 번개와 비를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정기 간행물들에 목사들의 글이 실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대부분의 글에서 도덕 의식의 고양을 부르짖기도 하지만, 어떤 목사들은 이방인들과 회의론자들 그리고 만인구원론자들과 사악한 자들 사이에서 스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십자가의 거침이 사라지다니요. 하나님의 거룩한 법과 엄중한 계명 그리고 두려운 형벌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강단에서 외면을 당하거나 경멸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설교해야 할 내용들인데, 이것들을 외면한 설교나 저술을 내 놓음으로 사람들에게 칭송을 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각 개인들과 또 대중들 사이에서 아래로만 향하고 있는 도덕 의식을 위로 끌어당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나라의 강단을 바로 세우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선포하고, 삶의 법칙으로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강단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의 죄악된 마음을 낱낱이 드러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는 피는 그들의 마음에서 죄악을 씻어냅니다. 이런 설교가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설교자들은 “복음을 지키려고 세우심을 받은”(빌립보서 117)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의 수도와 상하원 의원들의 귀에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율법과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해서, 듣는 이들의 양심을 뒤흔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곳에서 설교를 출판하는 것은 흔해 빠진 일입니다. 설교자들은 독자들의 구미에 맞춘 설교를 써서 출판합니다. 배교한 청교도적인 설교들이 부호들과 도박꾼 그리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면야 듣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거룩함도, 도덕적인 분별도 없이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읊어대는, 물에 물 탄 듯한 설교는 멀리 치워버려야 합니다.
죄인들에게 화를 내시는 하나님의 모습 없이 그분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설교는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잠들 정도로 하나님의 법을 설교하는 데 게을리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네들의 설교 속의 청교도 정신이 무너지지 않았던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양심이 이 모양으로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개월 전에 담임 목사가 사망하는 일을 겪은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는 교회와 그 지역 사회에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던 사람인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교회는 그를 거의 우상화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칭송했고, 그를 신앙 생활의 본으로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에게서 들어 알게 된 목사의 모습은 사람들의 갈채와 사랑을 얻으려고 애썼던, 한 믿음 없는 사역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들로부터 그가 생전에 가르친 내용들을 듣고, 또 그 열매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난 저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은 그저 믿음 없는 사역자 하나를 모시고 있었던 것뿐이었음을 말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교회와 교회 밖의 지역 사회에 드러난 열매들을 따져 보면, 그 열매들은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나타나는 열매들이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제 말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말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이 땅이 부도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설교자들의 잘못이 큰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썩어 있다면, 그것은 강단의 잘못입니다. 교회가 퇴보해서 세속화되고 있다면, 이 또한 강단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사탄이 이 나라의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다면, 이러한 현실의 책임도 강단에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정부를 구성하는 정치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해 있다면, 이 또한 강단의 책임입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염두하고, 이 나라의 도덕성이 그들의 어깨에 짐 지워져 있음을 자각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찰스 피니 /『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ː제11장 』...

  POWER FROM ON HIGH
     by
     Charles G. Finney17921875

     Copyright ⓒ 2001 Korean by Pilgrim Books.
     Seoul, Korea.

11장ː부패한 양심 】

(로마서 3:2231갈라디아서 5:6

3:22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25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를 선포하심은 자신도 의롭게 되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 2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 29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시고 이방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물론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정녕 할례자도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하고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니라. 31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5: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쓸모없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요한복음 15:9요한일서 5:4

15: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계속 거하라. 5:4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 ─ For whatsoever is born of God overcometh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overcometh the world, even our faith.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