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3. 03:25

“ 원수에 대한 사랑 ” (양육/성장)

● 산상 설교 ː “ 원수에 대한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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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Matthew 5

43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네 원수를 미워하라.’ 고 말한 것을 들었거니와,
44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심이라.
46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으리요? 세리들도 그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만일 너희가 너희의 형제들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3 ¶ Ye have heard that it hath been said,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nd hate thine enemy:
44 But I say unto you, Love your enemies, bless them that curse you, do good to them that hate you, and pray for them which despitefully use you, and persecute you;.
45 That ye may be the children of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 he maketh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eth rain on the just and on the unjust.
46 For if ye love them which love you, what reward have ye? do not even the publicans the same?.
47And if ye salute your brethren only, what do ye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the publicans so?
48 Be ye therefore perfect, even as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is perfect.

산상 설교 ː “ 원수에 대한 사랑 ”

산상 설교에서는 여기서 처음으로 ─ 이미 말한 것을 종합한 ─ “사랑” 이라는 말을 볼 수 있고 이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이라고 똑똑히 밝혔습니다. 형제애(兄弟愛)라는 말은 예수님의 뜻을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지만 원수애(怨讐愛)는 오해의 여지가 없이 명백합니다.
제자들에게 원수라는 말은 빈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원수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원수를 매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이 원수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앙을 파괴한다고도, 율법을 범한다고도 비난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체를 거슬러 모든 것을 경솔하게 취급한다고 그들은 힐난하였습니다. 어질고 겸손한 제자들은 원수들의 이 비난과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제자들을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제자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것을 위험한 단체라고 무고
(※ 誣告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함.)하고 없애 버릴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님의 일방적 요구에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으며 그들은 또한 모든 “민족 종교”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이 원수들은 권세와 위엄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그들의 원수는 유대인 전체가 싫어하는 로마의 정치가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제자들은 강한 억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넓은 길을 가지 않고 “좁은 길”을 좇는 제자들은 이 두 큰 원수의 무리를 날마다 개인적으로 만났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들은 제자들을 경멸, 멸시, 위협으로 대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는 계명이 있을 뿐입니다(출애굽기
23113┃잠언 2521, 22┃창세기 451사무엘상 247┃열왕기하 622 등등).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지시한 원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의로 맺는 원수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전쟁 행위를 세상 모든 싸움 중에서 오직 홀로 거룩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우상의 세계를 타파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적대 관계를 여기에서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그분은 자기의 백성과 더불어 엮어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 전부를 비난하여야 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옛 약속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문제는 위에서와 같이 원수의 극복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승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제자들의 교회를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 체제에서 갈라 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소위 신앙의 전쟁은 이미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원수를 이기는 승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의 무거운 짐임을 자연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어디서나 우선 힘드는 일이고 선악 개념에 상반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원수애에서 율법을 아는 사람이 더욱 모순을 느끼는 것은 원수애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떠나 그를 정죄하라는 것이 율법의 요구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원수애의 의한 원수의 극복 ─ 이것이 그분의 율법 해석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에서의 원수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나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한 말씀은 언젠가 어떤 사람과 원수가 되리라는 가상 밑에서 말씀하신 것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대하고 있는 실제적 원수에게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행위는 상대자의 행위에 따른 상대적 호응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행위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애는 일방적 행위이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수애는 나의 사랑을 그가 느끼지 못하고 계속 원수인 적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만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지만 나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그를 진심으로 섬길수록 점점 더 나를 싫어합니다.
『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의 대적들이 되었으나 나는 기도하나이다.』(시편 109:4). 그러나 사랑은 보답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 굶주린 자를 찾습니다. 어떤 사랑도 모르고 증오에서 생을 이끌어 가는 자처럼 사랑을 안타깝게 갈망하는 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원수보다 사랑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자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이 화려하게 빛날 수 있는 곳도 원수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원수의 종류와 사랑의 차이를 모릅니다. 원수의 적의가 크면 클수록 그는 나의 사랑을 더 갈망한다는 것을 알 따름입니다. 이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베풀어야 할 타산 없는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은 공사의 구별을 모릅니다. 사적인 나와 공적인 나는 하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이든가 좇지 않는 자일 따름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이 사람의 겉모양을 가리지 않고 축복을 빌고 자선을 행하며 기도함으로 실천됩니다.

44 원수들을 사랑하고 전장에서는 악을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소극적으로 악과 악한 자를 참을뿐더러 몽치를 몽치로 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적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나 거짓 없이 순진하게 원수를 섬기고 도우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도 그것이 만일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받는 자에게 베푸는 것이라면 크고 아까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도 사랑의 대상이라면 경우는 같을 것입니다. 우리 재물, 우리 영예, 우리 생명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것을 우리는 원수에게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랑은 악을 관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약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데서, 공포에서가 아니라 진리에서 솟는 사랑입니다. 어찌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증오로 가득 차서 질식할 지경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사랑할 것입니까?
44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우리의 사랑이 그들을 괴롭게 할 때 그들은 우리를 박해할 것이니 그 때 우리는 기도의 손을 들어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원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당신들의 저주와 박해가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의 가난을 자신의 풍성함으로, 당신들의 헛된 저주와 박해를 축복으로 벌하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의 이 축복만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도 당신들의 저주와 박해를 달게 참겠습니다.”
44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말이나 생각에만 이 사랑이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선한 일은 일상 생활과 모든 일에서 나타나야 합니다.『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만일 그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로마서 12:20). 곤궁할 때 형제가 형제를 돕고 상처를 동여 주며 아픔을 진정시키는 것같이 원수에게도 행하십시오. 우리의 원수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과 더 중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자가 세상 어디에 또 있다는 말입니까?『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44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비상(非常)한 것’입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적의 편에 서서 적을 대신할 수 있고 적과 같이 되어 적을 돕고 적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사랑하고 축복하고 위하여 선을 행했던 원수에게서 우리가 비방과 박해를 받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끝까지 우리를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대신 기도함으로 그를 위하여 봉사하는 결정적 발걸음을 옮긴다면 그가 우리를 해하지도 정복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어려움과 가난과 허물과 방탕을 책임지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가 대신합시다! 이것으로 인하여 오는 모든 비방은 우리의 하나님과 원수에 대한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온갖 박해도 원수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은 어찌하여 적이 없을까요? 우리의 사랑은 보답을 묻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만을 바라보며 행하기 때문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怨讐愛)”은 제자를 ‘십자가로 가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 끌려 들어갈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욱 견실해지고 원수의 증오는 자신있게 정복될 것이니 이 사랑은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철두철미 원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기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로마서 510┃고린도후서 51820┃에베소서 216┃골로새서 12022┃히브리서 217┃요한일서 2241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길’ 에 당도할 때 제자는 그들 자신이 예수님의 적이었던 것도 그의 사랑에 의하여 정복되었다는 것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여 예수님께서 원수들 중에서 형제를 찾고 있다는 것과 형제와 원수의 구별 없이 그분이 행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제자들은 오직 자신의 원수를 형제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이웃처럼 자기 교회에 이끌어 들이신 분의 사랑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좇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떠 하나님의 사랑이 원수를 포섭하고원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서 선과 악을 묻지 않으시니 나의 선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을 안타깝게 바라고 사랑에 주린 원수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에게서 자기 사랑을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사랑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태양을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게 하심과 같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악한 자와선한 자에게 내리는 지상의 햇빛과 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태양은 의의 태양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비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은혜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순 없는 완전한 사랑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시며 또 이 일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과 무저항에 대한 계명은 특별히 우리가 수년 동안 이미 당하고 있는 혹은 비로소 시작하는 신앙의 싸움에서 증오와 사랑의 엇갈림 속에 뚜렷하여 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이 싸움을 위하여 크고 심한 괴로움을 각오하여야 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각기 이 신앙 고백 때문에 증오와 횡포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 이미 증오와 횡포는 당하고 있지만─ 단지 이 신앙 고백 때문에 이른바 ‘인간 사회’에서 축출을 당하고 곳곳에서 내쫓기며 사로잡혀 폭행과 죽음을 당할 때가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폭적인 그리스도인 박해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보는데 사실 이미 시작된 지금의 모든 움직임과 계획이 결국 그리스도인 박해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파괴하려는 태세를 이미 갖추고 적은 우리와의 공동 생활을 이미 단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이 의식적으로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말과 행동을 정죄하는 것같이 그들에게 보이고 이것은 또한 당연한 것으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 우리에게 철두철미 무관심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자기들의 비난이 무력하고 헛되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옳은 것이 있는 것처럼 분쟁과 언쟁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기 한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싸움은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이제는 먼저 고립적 개인의 싸움을 지양하고 공동체가, 교회가 같이 힘을 합하여 기도의 손을 들어 올릴 것이며 수가 적을지라도 한 무리가 되어 수천만 배교자들 틈에 끼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재림을 큰 소리로 고백하고 찬양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기도, 어떤 신앙 고백, 어떤 찬양을 뜻하는것일까요?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잃은 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라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증오의 눈망울을 굴리며 우리를 노려보고 우리를 살해하고자 이미 손을 높이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혼미와 착란에 빠져 제 정신을 잃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하는 화평의 기도요, 우리가 기뻐하는 같은 사랑, 같은 화평을 위한 기도라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분명히 그들의 마음 깊이 스며들어 그들이 우리 마음을 정복할 수 있는 비상한 증오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마음을 열어놓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곡히 주님을 기다리며 징조로 때를 구분하며 때를 파악하는 교회는 영의 힘과 거룩한 생활의 힘을 모아 사랑의 기도에 전적으로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구별 없는 사랑!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사랑으로 보답하는 자들은 편파적이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나 형제, 동족, 친구 또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대한 사랑은 이방인들과 세리들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랑은 자명한 것이며 이미 있는 것이니 자연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결코 ‘그리스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는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다름이 없습니다. 혈육과 역사 혹은 우정으로 가까운 자들에 대한 사랑은 이방인도 그리스도인도 누구나 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문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추구할 필요도 강조할 필요도 추켜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주어진 이 여건이 스스로 발동하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형제와 동족, 친구 사랑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자연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 사실을 다짐하였을 뿐 더 말을 끌지 않고 오히려 유일한 사랑인 “원수를 사랑하라(怨讐愛)”고 명령함으로 무엇이 참사랑이며 또 전자는 어떠한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이방인과 제자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5장 전체가 지향하고 있는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특별하고 엄청나고 비범하고 비상하며 자명한 것이 아닌 것, 바리새인을‘능가’하는 더 나은 ‘의(義)’이며, 그들 위에 솟는 것, 그리고 더 나은 것, 뛰어난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본능적인 것은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꼭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적인 것은 뛰어난 것에서 시작하고 이것에서 비로소 저 본능적인 것은 바른 의미를 얻을 것입니다. 이 “특별한 것, 비범한 것”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적인 것이 없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본능적 여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위에 솟아 나온 것에 그리스도적인 것이 있습니다. 더 뛰어난 것이 결코 같다는 것에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국애나 우정, 혹은 직업애에 합해 버리려는 주장과 더 나은 의를 ‘시민의 의’와 같이 보려는 것은 잘못된 신교 윤리의 큰 과오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적인 것이 죽고 사는 것은 비범한 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뛰어난 것에 유의하여야 하기 때문에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것과 비범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축복을 받은 자들과 주 예수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의 현실적 생활에 있습니다. 그들은 비치는 빛이며 산 위에 세운 성읍입니다. 그들의 생활은 자아 부정의 길이요, 절대적 사랑, 절대적 순결, 절대적 성실, 절대적 무저항의 길입니다. 그들의 생활은 원수에 대한 구별 없는 사랑, 사랑을 주는 자도, 사랑을 받는 자도 없는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원수된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뛰어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참음으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한 예수님 자신의 사랑입니다. 아니 차라리 십자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것은 다른 아닌 십자가라 할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넘어 솟아 있게 하고 세상을 이긴 승리를 선사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사랑 안에 있는 수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실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비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비범한 것은 눈으로 의심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니 이것으로 인하여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비범하여 숨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꼭 보아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의 교회는 더 나은 의의 공동체로서 세상 질서 위에 우뚝 솟은 보이는 교회요,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의 교회입니다.
이 특별한 것이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범한 것 ─ 이것은 가장 큰 방해물이기도 한데 ─ 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의 행위라 하겠습니다. 즉 이 비범한 것 ─ 더 나은 의(義)와 같이─ 은 행동으로 나타나 남에게 보여야 합니다. 윤리적 고집이나 괴벽한 기독교 생활양식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뜻을 단순하게 순종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이 행동이 계속 ‘특별한 것’으로 지속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행동 자체가 이미 이어 받은 수난입니다. 아니, 이 행동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수난을 겪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이 아닙니다.
뛰어난 것은 그러므로 행동에 따른 율법의 성취요, 계명을 지키는 행동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그의 교회에서 이렇게 이 ‘비범한 것’은 사건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한 사랑의 소유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차별 없는 완전한 사랑이 곧 ‘비범한 것’이요, 십자가의 공동체가 받는 수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의 완전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란 다름 아닌 축복받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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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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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HFOLGE
by
Detrich Bonhoeffer

1965Korean b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Korea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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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기 】

날짜ː 2007. 4. 1.오전
▶ 제목ː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요한계시록 2019
시간ː5358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4

날짜ː 2007. 4. 1.오후
▶ 제목ː영원의 가치 』〔 이 송오 목사 〕
성경구절ː〔 전도서 31115
시간ː4544
주소ːhttp://psalms1217.ohpy.com/36776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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