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양육/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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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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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예수 그리스도의 따라오라는 부름을 따라 그에 합당한 사람들이 받은 약속 중에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한다는 약속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제가 되어 그의 모습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이루어야 할 최후의 과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따르는 자가 언제나 눈 앞에 가지고 있고 그 앞에서는 다른 모든 형상들이 자취를 감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에게 침투되어 그들을 채우고 변화시켜 선생을 닮고 아니 선생과 같이 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일상 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의 모습에 아로새겨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제자들이 죽은 사람의 그것 같이 한가히 바라보며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습에서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솟아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순종하는 자는 그의 모습을 반드시 지닌 자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같은 형상의 숨은 형제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피조물인 아담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의 형상을 만족하여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창세기 1:31)고 하셨습니다. 아담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주와 같다는 사실은 태초 이래 풀 수 없는 인간의 비밀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다”한 것입니다(창세기 1:26). 그러므로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는 비밀을 감사와 순종으로 지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먼 목표요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행동과 노력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뱀의 속임수였습니다. 이 때 아담은 은혜를 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선택했었습니다. 피조물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같다는 자신의 본질적 비밀을 스스로 풀어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지으신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자기 멋대로 ‘하나님과 같이’(sicut Deus)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으로 받들고 그 결과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홀로 창조신이 됨으로 하나님(God)이 없는 무의미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풀려던
수수께끼는 역시 풀지 못한 채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과 같은 자신의 본질을 인간은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라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정의(定義) 없이 인간은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아닌데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 수 없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의 모순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그 이래 아담의 오만한
후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모습을 자신의 힘으로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다시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진지할수록,
희생이 크면 클수록, 노력의 결과가 그럴 듯하여 자랑이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모순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만든 그들의 잘못된 모습은 부지중에 점점
사탄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주의 은혜인 하나님의
형상은 이 세상, 그들에게서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직 죽는 길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버지 곁에 거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그 형상을 벗고 종의 모양으로 인간에게 온 것입니다(빌립보서 2:5∼).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없는 형상의 변화가 하나님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있을 하나님의 형상이 이제는 죄짓고 타락한 인간의 형상을 입었으니『...하나님께서...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세상에 보낸 것입니다(로마서 8:3∼).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다는 데 있을 뿐입니다. 어떤 새 이념도 더 나은 종교도 이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한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은 각기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몸과 생명이 밖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한갓 말이나 생각ㆍ의지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모든 점에서 사람됨을 말한 것이니 한 형태요 형상이며 형제입니다. 그에게서는 새 생각, 새 뜻, 새 행동뿐 아니라, 새 형상, 새 형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죄의 육신과 같은 형상을 입고 저주받은 우리 인간 생활을 몸소 체험하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가르침과 행동, 생명과 죽음에서 그분의 모습은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그분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땅 위에 다시 창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되심과 말씀, 행동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모두 이 형상의 소속입니다. 낙원에서 첫 영광 중에서 살았던 아담의 것과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세계에 오신 분의 모습이며 육신의 곤고를 스스로 맛보시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겸손히 받았으며 죽음과 수난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분의 모습입니다. 가난에서 탄생하셨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그들과 식탁을 같이한 분이며, 하나님과 인간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버림을 받고 외로이 홀로 남은 이 분의 이 모습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새 형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수난의 표지인 십자가의
상처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에서 은혜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모습은 하늘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영광 속에서 계속 생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다 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신 그의 인간성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이 되도록 그분은 그들과 같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임함(성육ㆍ成肉)으로 전 인류는 하나님의 품위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형제에게 학대를 할지라도 그것은 그분이 전 인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얼굴만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분과 공동 생활을 함으로 우리는 본래의 인간성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이 생활에서 우리는 사사로운 죄를 벗어나 전 인간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HanSaRang 註. ─ 잃어버린 참된 인간성을 되찾는 것, 이것이 사람이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는 근본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는 참된 인간성을 되찾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고린도후서 5:17┃갈라디아서 6:15).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대적하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나님의 권좌를 차지하고 싶었던 사탄’에게 속임 당한 아담의 모습처럼 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육은 밑이 빠져 버린 물통과 같다. “구원이 없는 교육은 저주일 뿐이다.” 】육체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할 때 우리는 그가 지닌 전 인류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에서 우리 자신이 비로소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유지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인간성은 다른 사람의 곤란과 허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분이 자신의 제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형제가 되도록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으로 계시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디도서 3:4)이 땅 위의 모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이룩한 것입니다. 육체로 임하신 분의 형상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며 이 몸이 전 인류의 죄와 곤궁을 담당하고 유지하게 됩니다. 지상의 그리스도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린 죽은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제자의 생명은 바로 이 모습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요(빌립보서 3:10┃로마서 6:4∼23),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입니다(갈라디아서 2:19).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를 베풂으로 받아들인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자신의 죽음의 모습으로 조각합니다. 육신과 죄에서 죽은 까닭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14). 침례에서 산 자는 죽음에서 산다고 하겠습니다. 육신에 대항하는 정신의 싸움에서 날마다 죽는 죽음으로, 마귀가 그리스도인을 후려치는 죽음의 쓰라림과 날마다 당하는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의 생명에 인장으로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또 모든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고생인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순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격자는 제자들 중 소수의 무리일 것입니다. 이 소수의 무리에서 그들의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된 형상이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 없이 굴욕, 고난, 그리고 죽음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교회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은 이후 순교에 이르는 모든 고난은 같은 것이요, 같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신 분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새 창조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분의 공동체에서 살며, 그분의 형상을 이룬 자는 영광
중에 부활하신 분과도 같이 될 것입니다.『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49).『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한일서 3:2).
십자가를 지신
분의 형상같이, 부활하신 분의 모습도 그분을 바라보는 자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그분의 모습을 닮은 것이며
그의 형상과 같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의 거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통하여 이미 지금 반사됐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은 이의 형상에서 이 형상에 맞게 우리는 지금 고난의
십자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부활하신 분의 영화로운 생명이 솟고
빛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이 점점 더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 중에서 점점 더 밝아집니다.
이렇게 점점 우리의 그분에 대한 인식은 깊어지고 더 맑아지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양은 점점 더 완전해집니다. 이것을 형상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부르십시오.『그러나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고린도후서 3:18). “그리스도와 같이”(kaqwV CristoV) 되라는 신약 성경의 거듭된 요구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으라는 것으로 파악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따르는 본(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친히 우리 중에서 실지로 우리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신 대로”(요한일서 2:6), “행한 대로”(요한복음 13:15) 우리도 할 수 있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같이”(에베소서 5:2┃요한복음 13:34/15:12) 사랑하고, 그분이 “용서하신 것같이”(골로새서 3:13) 용서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빌립보서 2:5)을 품을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 준 한 본을 따를 수 있으며(베드로전서 2: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우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16). 오직 그분이 우리와 같았다는 이유에서만 우리도 그와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분과 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kaqwV CristoV)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의하여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본으로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제적 행위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생활이 순박한 순종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같은 생활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생깁니다. 나 자신의 생명이나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새 모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보려고 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다시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거울에 나타난 어렴풋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가는 자”는 오직 앞에 가시는 대상만을 바라볼 따름입니다. 그러나 따라감으로,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된 자에게 다시 한 번 끝으로 다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에베소서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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