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 1월 15일 】▶신학(神學)을 학문적으로 온건하게 존경하라. 신학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대의 내적인 생활을 누리는 데에 있어서 신학의 지식은 필요가 없다.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시니라. 4 니코데모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 라고 하니 5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7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 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 고 하시니라. 9 니코데모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하니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일들도 모르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또 본 것을 증거하노라.그래도 너희는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들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곧 하늘에 있는 인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3∼13)
『 21 ○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영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아버지시여, 이런 일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선함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누가 아들인지 아무도 모르며, 또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는 자 외에는 누가 아버지인지 아무도 모르나이다.” 라고 하시더라. 23 ○ 또 주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들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들과 왕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보고 싶어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느니라.” 고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1∼24)
우리들이 교회의 고위 성직자건, 선교사, 집사나 수녀회의 수녀 등 성직에 있는 사람들을 평가하고자 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종교적 능력’을 그들이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다른 이들을 위안하는 능력,” “능력 있는 기도(요한복음 15:7),” “아픈 자들을 치유시키는 능력(마가복음 3:15∼18),” “죄를 사해 주는 능력(마태복음 18:18┃요한복음 20:23),” “예언자적 능력,” 보다 정확히 얘기한다면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즉 성령님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는지 여부이다(요한복음 17:17┃요한일서 5:20). 이상 열거한 여러 능력 중 적어도 몇 가지를 갖추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면 그가 어떤 위치에 있건, 어떤 명망을 얻었건 믿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 이외의 다른 사항들, 예를 들면 신학에 대해 박식하다든지, 교회의 출석에 열성적이라든지, 설교를 아주 요령있게 잘 한다든지 하는 재능 등은 필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수도 있다. 앞서 얘기한 필수적인 능력들은 후천적인 교육이나,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직위와 함께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허락된 자만이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시대와 교파를 초월한 진리이다. 만일 성직자에게 이런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성직자 그 자신의 책임이다. 가끔씩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회의와 남을 감화 감동시키는 능력의 결여는 바로 앞서 말한 필수적인 능력이 없어서이지 다른 이유란 있을 수가 없다. 『 나답과 아비후는 이상한 불을 주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민수기 26:61) 『 1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 2 주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 앞에서 죽은지라 3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주께서말씀하신 것이니라.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게 가까이 오는 자들 중에서 성결하게 되리라. 또한모든 백성 앞에서 내가 영화롭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아론이 잠잠하더라.』(레위기 10:1∼3) 『 이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엇음이니 만일 그 심판이 우리에게서부터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종말은 어떠하겠느냐?.』(베드로전서 4:17) 이런 상황은 오늘날의 많은 성직자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아무런 소명의식이 없이 그저 직업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 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확장을 위해 주절거리고 있는 데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 자신의 영적인 생활은 나날이 파멸의 구덩이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든, 자신은 세계와 손을 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갖지 않고 올바른 길에서 타인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자는 많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성직자’이다. 성직자로서 이러한 특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 가치가 없다. 그대가 이런 부류의 인간에 속한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그것이 비록 왕관일지라도 더 이상 그것과 교환하지 말라. 왕관도 이러한 심정으로 머리에 쓰고 있을 때에만 오늘날에 약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 1월 16일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에 있어서 확실히 인정될 수 있다. 첫째로, 때때로 아주 갑자기 아무런 외적 동기도 없이 나타나는 매우 초현실적인 환희와 기쁨에 의해서이다. 둘째는 이런 자들은 다른 수천의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이기주의와 결부된 일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나, 이와 반대되는 어려운 일이나 특수한 일에는 아주 훌륭하게 그리고 아주 쉽게 성공한다는 것에 의하여 더 확실히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이러한 은총을 입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정직하게 원하고 구하며, 인생의 다른 어떤 보물을 내팽개치더라도 이것을 얻으려고 마음먹는 인간이면 누구든지 온갖 희생이나 준비 없이도 은총을 얻을 수 있다. 참으로 그렇다. 그런 인간은 오히려 이미 은총을 입고 있으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조짐도 나타나고, 멀지 않아 이제는 무엇 하나라도 의심할 나위가 없게 된다.
【 1월 17일 】▶하나하나의 혼이 진실된 생활에 이르렀을 경우, 자기 내부에서 체험하는 생성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만족스럽지 못한 현세적 노력을 그만두고 하나님에게로 전향하라. 악한 것과 무관심을 버리고 착한 쪽으로 전향하게 된다(이사야 45:22). 둘째,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다른 것의 추구와 함께가 아니고 혹은 병행해서도 안 된다(마태복음 6:33).그래야만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싹튼다(요한복음 15:7/16:24). 마침내 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내적인 평안과 현세의 극복이 생기게 된다. 이 현세에서는 최고로 좋은 운명 아래에 있다 하더라도 불안과 근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요한복음 16:33). 인생이란 부단한 극복 아니면 굴복 둘 중의 하나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 이외의 길이란 없다. 『 요단 강 가에서 』 ─ 신명기 10∼11장 ─
아아, 진정 그대가 강건하고 싶거든 끝으로 일손을 놓고 조용히 앉아 말하라. 주여, 이제 저를 데려가 주소서. 여전히 악에 물들어 착한 사람이 못 되더라도.
믿음과 함께, 교만함을 버리고 건방진 마음과 싸움 또한 없게 하소서. 온 세상 거짓 쾌락이 저에겐 고통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게 하여 주소서.
제 혼자 스스로 깨끗이 되길 원하옵지만 주님의 크나큰 축복이 없으면 아니되옵나이다. 주님께선 인내와 사랑으로 제 모든 죄를 사해 주시겠지요.
제 모든 운명은 주님의 뜻. 이제 다시 그물을 강에 드리우나니 주님의 사랑, 이는 곧 제 삶의 목적임을 아시와 주여, 지금 주님의 위대한 사랑의 역사(役事)를 베풀어 주소서...
【 1월 18일 】▶나쁜 독서는 좋지 못한 교제보다 더 해롭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참으로 완전한 사악이나 타락의 덩어리이면서도 껍데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저 상상 속의 존재같이 완벽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악인들로부터는 자연적으로 격리되어 그를 경계한다. 그러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추잡한 종류의 책, 신문소설, 희곡 따위가 좋은 가문의 부녀자들의 눈에 뛴다는 점이다. ‘한 권의 책’은 때때로 모든 생애의 불행 ─ 물론 행복도 마찬가지 ─을 불러오게 된다.
【 1월 19일 】▶그대는 인간은 자연적인 소질과 생명의 숙명에 있어서는 동물과 유사하다는 신앙을 확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부류의 근대적인 온갖 견해에 대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런 견해는 그것이 가장 옳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그 증명은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동물을 대등하게 여기는 견해를 따른다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 없어진다 ─ 여기까지는 이 가설이 옳다고 할 수도 있겠다. ─ 그 이외의 다른 점은 이제 별다른 가치가 없다. 오늘날 이 암초에 부딪쳐서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때로는 모든 민족의 복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한 아무런 언급없이 교회정신이 금수설과 동등하게 장려될지라도 이 단순한 교회정신은 이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도 될 수가 없다. 생활을 지배하는 견고한 확신이 진화론(進化論)과 맞서야 한다. 단지 철학적 사색의 길에서, 혹은 현대 자연과학을 종교와 결부시키려는 시험에 의해서 현대인이 확고한 신앙에 이르렀다는 실례를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신앙에의 도달은 실로 실천적 요구의 길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인 행복, 또는 끊임없는 내적 행복에 이르는 길은 다른 방법으로써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높은 것을 향해 노력하는 각 혼에 있어서는 가장 광활한 이상주의에 전적으로 상응하는 것과 같은 영적(靈的) 존재에 대한 신앙, 그리고 인간성의 가장 열등한 본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장 높은 이념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에 대한 신앙이야말로 가장 긴급하고도 필수적인 생활요소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 없이는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으며, 또 인생이 그에게 주는 온갖 고난에 맞서서 자신의 생존을 느긋하고도 여유있게 계속할 수가 없다. 현대 영국의 한 여류 소설가가 말한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들에게 적합하다. 아니다, 그대여 주저하지 말라 ─ 가장 숭고한 것을 구함을. 갈망하는 것은 확실한 선(善) ─ 이것은 그대의 유일한 선이다. 그대는 비로소 깨달았노니, 저 높은 환상은 온갖 비천한 선택을 거부하므로.
【 1월 20일 】▶그런데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나의 이해력은 그러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직관에는 반대한다. 아마 실제로 믿을 수 없다는 것도, 반대한다는 것도 모두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이러한 초감각적인 세계와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첫째로 어떤 다른 종류의 경향이지 이해력은 아니다. 이해력이라는 것은 의지가 이미 결정한 것을 인정할 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언제나 이 이해력의 망설임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6:23)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할 수 없는 갖가지 마음의 경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대와 그대의 행복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다. 잘 생각하고 찾아내어 이를 없애라. 그러면 신앙은 아주 쉽게, 매우 자연적으로 싹트게 된다.
【 1월 21일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기도엔 정해진 시간이나 날씨, 자세 등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단순한 말을 단지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일정한 틀이나 격식은 도리어 진정한 기도를 방해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세상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은 이 말의 참뜻을 모르고 있다(데살로니가전서 5:17).
인간은 단순하게, 정직하게, 형식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며 ─ 그런데 이 일은 오늘날 우리의 종교 교육에 있어서 이미 찾아보기 힘든 기술이 되었다 ─ 또한 그 응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의 번거로움과 자기에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미묘한 내적인 귀가 필요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이른바 수많은 ‘기도하는 자’들은 그저 그들의 기도에 정해져 있는 문구만을 암송하고, 그것이 끝나면 즉시 떠나 버리거나 수프에 즉시 숟가락을 대거나 한다. 마치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더구나 응답따위는 애초부터 기대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Bible Believer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