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4. 21:47

“ 결혼은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다 ” (에세이 모음-②)

(글모음) [20061005] ● 결혼은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다 … (에세이 모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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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aceful Hymns on Violinㆍ잔잔한 찬송가 바이올린 연주 모음┃(53:39)

결혼은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다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④ ━ “ 결혼은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다 ”

  결혼생활의 파탄을 호소해 오는 독자가 여전히 많다. 그것이 오늘날에 한한 것은 아니겠지만, 요즈음에 특히 많아진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호소해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늘 생각하는 것은, 결혼생활을 너무 안이한 생각으로 출발했다고 하는 것이다.
“좋아졌다”, “육체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결혼했다” 이런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것도 좋아지면서부터 결혼하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짧다. 개중에는 1, 2년씩 기간을 잡는 예도 있지만, 그 동안에도 임신 중절을 시켰다든가 하는 사건들이 끼어 있어서, 역시 너무 경솔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다.
  연애가 곧 육체 관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무책임하게도 많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도식을 배우게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좋아서 결혼했는데, 남편이 변심해 버렸다”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싫은 사람과 결혼하라고는 물론 하지 않겠다. 결혼 상대를 고르는 데 좋고 나쁜 감정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은 잔인한 행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소꿉놀이가 아니다. 연애시절이라면,
“긴 다리가 좋기도” 하고, “깊숙한 눈이 좋기도” 하여서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다음에는, 그런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키가 180센티이고, 대학 출신에 ‘핸섬’하다는 정도로 이 인생의 거친 파도를 넘어 전진할 수 있을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아무리 다리가 길더라도, 눈이 깊숙하여 아름다울지라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인생길을 진실하게 걸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들었다.
  
“좋다, 나쁘다 정도로 일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데, 단순히 좋다 나쁘다는 감정만으로 상대를 택해서는 너무 경솔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 또한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역시 ‘좋아한다’고 하는 의미일 뿐일 때가 많다.
  사랑이란 말에는
‘인류애’, ‘부성애’, ‘모성애’, ‘우애’, ‘연애’ 등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본래의 높은 의미의 사랑을 되찾아 보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결혼을 생각할 때에는 더욱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본능이 아니고 의지인 것이다. 유명한 ‘사랑의 장(章)’이라고 하는 신약성경의고린도전서를 펴 보자. 그 13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5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급히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뎌내느니라. 』

  이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사랑이다. 우리들 인간이 이 사랑에 도달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긴 하지만,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목표로 삼을 수는 있다.
  나는 젊은이들이 이런 사랑을 알고, 이에 관하여 토론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생각한다. 특히 결혼을 앞둔 교제에 있어서 그래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좋다고 해서 느닷없이 서로의 육체를 요구하는 따위의 무례한 짓도 하지 않게 되리라 생각한다. 또 결혼한 뒤에도 간단하게 가정을 내동댕이치는 따위의 경솔한 짓은 하지 않게 되리라 생각한다.
  되풀이하지만, 결혼이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맺어지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 인격과 인격의 결합인 것이다. 안이한 생각으로 결합했다가, 곧 파탄에 직면하여 울고불고하지 않도록, 나는 마음으로부터 ‘사랑 있는 결혼’을 권하고 싶다.

  ⑤ ━ “ 행복한 결혼을 위해 ”

  나는 지금,주부의 벗이라는 잡지에 ‘미우라 아야꼬에의 편지’라고 하는 연재를 하고 있다. 즉 나에게 고민거리를 상담하는 난인데, 상담자의 대부분이 기혼자이다. 실로 많은 편지가 내 손에 넘겨진다. 그 밖에도 나 개인에게 보내오는 상담 편지도 끊이지 않는다. 독신으로 평생을 지냈더라면 절대로 갖지 않았어도 되었을 고민도 많이 있다.
  그 몇을 소개하면, 고부간의 문제, 남편이 끈기가 없어서 몇 번씩이나 직업을 바꾼다는 문제, 도박에 생활비를 몽땅 쏟아붓는 남편의 문제, 남편의 주벽, 노름에 관한 고민, 암이라든가 기타 난치병에 걸린 남편의 문제, 부모 자식 사이의 단절, 자녀들의 비행 문제, 그리고 가장 많은 것이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바람 비우는 문제이다.
  그 밖에도 고민의 종류는 많았지만, 지금 떠오르는 것만을 적어도 이렇게 많은 종류가 된다.
  생각해 보면 결혼한다는 것은, 많건 적건 간에 이런 고민과 직면하게 되는 것인 듯하다. 물론 독신에는 독신의 고민도 없지 않겠지만, 그 고민의 복잡함은 아무래도 기혼자 쪽이 더한 것 같다.
  나에게는 이런 기혼자의 고민에 부딪힐 때마다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결혼을 결심하고 어떤 동기로 결혼을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가끔 이상적인 결혼 상대를 물으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절대로 대학 출신이어야 하며 수입은 월 500만원 이상’
‘키는
180센티 이상, 체중은 70킬로 정도’
‘다리는 길쭉한 사람’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
‘눈이 고운 사람’
‘장애물이 적은 사람’
‘얌전하고 성실한 사람’

  과연 젊은 사람들다운 선택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지막의
‘얌전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별도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여기에 쓴 결혼의 조건을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소원을 갖고 결혼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 주기 바란다.
  
‘돈과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는 항목을 잊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결혼 후에 품는 고민을 그런 조건이 과연 해소해 줄 것인지 모르겠다.
  고부간의 문제를 다리가 길다고 해서,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얼마만큼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해결할 힘이 있다고 하면, 다리가 긴 사람을 남편을 맞이한 부인과 대학 나온 남편의 부인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녀들의 비행 문제를, 키가
180센티 이상 된다고 해서, 눈이 곱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대 중대사에 있어서, 설령 여기에 열거한 조건을 모조리 다 갖춘 남성이라 할지라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는지 알 수가 없다.
  남자가 평생을 같이 살 아내를 고를 때에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미인일 것,’ ‘요리 솜씨가 훌륭할 것,’ ‘건강할 것,’ ‘초급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질 것’ 등등의 조건을 내세우는데, 그것들이 과연 가정에 엄습해 오는, 앞에서 열거한 것들과 같은 수많은 고민들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자못 의심스럽다.
  나의 어머니 연배의 여성, 즉 명치(明治)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우리들보다 더욱 현명했던 것 같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주부로서 일에 대처함에 있어서 보다 현명한 지혜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대학은 고사하고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인간의 지혜나 살아가는 힘은 결코 학교에서만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다.
  우리들은 조금 인생을 얕잡아 보고 살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행복이란 것이 어떤 것일까?’ 하고 깊이 생각하는 일도 없이 그저 어물어물 살아가는 것 같다. 따라서 인생의 일대사인 자기의 결혼에 대해서도, 적당한 태도밖에 가질 수 없는 듯하다. 그 적당한 태도가, 앞에 열거한 것과 같은 결혼의 조건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결혼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또 좋다. 오늘 만나서 어제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상대와 한 베개를 베는 것까지도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무가치한 풍조에 실려서, 지나치던 남자에게 몸을 맡긴다든가, 반 장난으로 많은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을 어떤 새로운 유행인 양 착각하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자기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는 안목이 키워지겠는가?
  그런 생활 방식에 대하여 결혼이라고 하는 형식은 엄격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다. 결혼한 두 사람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경박하게 살아온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문제들뿐인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행복한 결혼이란 것은 결혼하고 난 뒤에는 늦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독신일 때에, 먼저 자기 자신의 생활에 책임을 가지고 쌓아 가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결혼생활의 토대는 양쪽의 결혼 전의 생활 양태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되겠다.
  혼자 살 때에 제멋대로 놀러 쏘다니기만 한다면, 그런 생활 속에서 어떻게 생애의 반려자를 확실하게 고를 수 있는 안목이 키워지겠는가?
  제멋대로의 생활 방식이 어떻게 결혼한 다음 날부터 바뀔 수가 있겠는가?
  참된 행복이란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행복한 결혼을 알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하고 난 뒤에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게 된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늦다는 사실을 결혼 전에는 느끼지 못한다. 이 사실에, 젊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에라도 눈을 떴으면 하고 나는 절실하게 바란다.
  지금부터라도 결코 늦지 않다. 일생을 의의 깊게 살기 위해,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추구해 나가는 일을 우선 시작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들 인간은, 물질이든 돈이든 누구한테서 받는 쪽이 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은 주는 쪽이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것은 단지 물질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는, ‘늘 사람들이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친절하게 해 주지 않았다’, ‘칭찬해 주지 않았다’는 등으로 남이 해 주지 않은 것만을 꼽아 가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미련함을 쏟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생활 방식은 어떠한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든가, 인사를 하든가, 위로해 주든가, 격려해 주든가, 감사하든가 해야 한다.
  늘 남이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늘 남에게 뭔가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가? 결혼생활의 행복은, 이러한 삶의 자세 여하에 따라 크게 변한다는 것을 말씀드림으로써 나의 조그마한 제언을 삼을까 한다.

  ⑥ ━ “ 행복한 가족 ”

  행복한 가족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들은 세상 물정을 잘 알 것 같은 남편과, 생긋거리며 미소 잘 짓는 아내가 사랑스런 어린애의 손을 잡고 걷는 것을 보면,
“아아, 행복해 보이는구나!” 할 것이다. 사람은 항용 그와 같은 수용 태세를 취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침마다 큰 개와 함께 산책을 하는 사이 좋아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아주 근실하고 온순해 보였고, 부인은 매우 총명해 보였다. 맵시 있는 블라우스와 와이셔츠 차림새가 한층 더 두 사람을 행복한 부부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남편은 집을 나갔다. 소위 증발사건이었다. 얼핏 행복해 보였던 그 두 사람에게, 이미 그와 같은 불행의 씨가 심겨져 싹트고 있었던 모양인데,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해서 그 두 사람에게 그런 불행의 씨가 심겨졌을까?
  
‘행복해 보인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인가?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부인(남편이 증발한)은 말했다.
  
“저는 행복했어요, 그이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그도 늘 행복하다고 했었구요.”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이미 젊은 애인이 있었고, 이번에 그 애인과 함께 도망친 것이었다.
  또 나는 이런 예도 알고 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인데, 그 가정의 부모와 자식들은 사이가 좋았다. 부부가 모두 머리가 좋았고 아들과 딸도 성적이 좋았다. 특히 그 아들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톱 클래스’에 속해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그들 자신도 자기들을 행복한 가족이라고 자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여름날 아침에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침 늦도록 일어나지 않는 아들을 깨우기 위해 방에 들어갔던 어머니가 제일 먼저 발견하였다.
  
“늦잠 너무 자면 눈(眼)이 녹아 흘러요.”
  방문을 열면서 이렇게 농담까지 했던 어머니는 그만 눈앞의 광경에 몸이 굳어져 버렸다. 간밤에 늦도록 자기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들이 목을 매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뭐라 말할 수 없었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상 행복한 가족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정에, 갑자기 엄습해 온 이 불행한 사건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후에 나는
‘달콤한 생활’이란 외국 영화를 보았다. 그 속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그려져 있었다.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아들이 있는 행복스러워 보이는 친구의 집에 초청된 주인공은, 그 행복을 부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그 행복해 보였던 친구가 권총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정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일까?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와 미우라도 이 세상에서는 사이 좋은 부부 쪽에 속해 있으리라 생각한다. 둘이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같이 성경을 읽고, 같이 기도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방에 있어도 싫증을 느끼는 일도 없고, 싫증을 느끼게 하는 일도 없다. 우리들은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다. 확실히
‘행복한 가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는 ‘행복한 가정이다’라고 가슴을 펴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적어도 당장은 행복합니다.”라고는 말할 수가 있지만,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언제 언제까지만 행복합니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험성이나 문제성을 많이 내포한 채 나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에 말한
‘개와 산책하던 의좋은 부부’도,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도망친 뒤에야 비로소 그 내면에 있던 문제가 외부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 날까지는 그 아내는 행복했었다. 남편은 딴 여자를 사랑하면서, 고민하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 고민을 감쪽같이 몰랐던 아내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 없이 남편은 벌써부터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남편이 또는 아내가, 이런 식으로 떠나가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들이나 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쁨의 원천이었던 아들과 딸이, 언제 슬픔의 씨앗이 될는지 모르는 우리의 형편이다. 어느 날 갑작스레 도둑질을 할는지, 횡령을 할는지, 교통사고로 죽을는지,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낳을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변하기 쉽고, 약하고, 미련하며, 타락하기 쉬운 성품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우리들은 자기 가족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휘말려 들어 “저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남편이 보다 남편다운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고 염려하는 처지가 되어서, 좀처럼 행복하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자신들이 늘 위험에 드러내기 쉬운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을 깨달아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탁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족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휘말리는 생활 방식으로서가 아니고, 주님 앞에 조용히 부탁드리는, 하나님과 직결된 생활 방식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되풀이하지만, 나는 당장은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은 행복하다. 하지만 내일은 모른다.”라고 하는 겸손함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자신에게 일러 주고 있다. 그리고 결코 변하는 일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믿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도 역시
“오늘은 불행하다. 그러나 내일은 행복해질지 모른다.”라고 하는 소망을 갖고, 불행한 사정의 호전에 희망을 걸면서, 하나님만이 변함없는 사랑 자체라는 것을 굳게 믿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미우라 아야꼬/『 고독에도 손길이 』...

 『 결혼은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다 ... 』(에세이 모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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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에도 손길이 」/미우라 아야꼬 지음.

(잠 언 8:323616:622:4고린도후서 3:17

 33 ○ 그러므로 오 너희 자녀들아, 이제 내게 경청하라. 내 길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느니라. 33 훈계를 듣고 현명하게 되며, 그것을 거절하지 말라. 34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나의 문들에서 지켜보고 나의 문설주들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 이는 나를 만나는 자마다 생명을 얻고 의 은총을 받을 것임이니라. 36 그러나 나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치는 자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사랑하는 자들이라. 16:6 ○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22:4 ○ 겸손함과 를 두려워함으로 말미암아 부와 명예와 생명이 있느니라. 3:17 이제 는 그 영이시니 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3:17 Now the Lord is that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eth; the flesh profiteth nothing: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 14:24 만군의 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것을 행하리니 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
14:24 The LORD of hosts hath sworn, saying, Surely as I have thought, so shall it come to pass; and as I have purposed, so shall it stand: 4:12 Therefore thus will I do unto thee, O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unto thee, prepare to meet thy God, O Israel.

(이사야 14:24아모스 4:12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