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30. 23:58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양육/성장)

(양육/성장) [20070930]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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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께 영광을ㆍGLORY TO THE LORD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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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

『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9)

  예수 그리스도의 따라오라는 부름을 따라 그에 합당한 사람들이 받은 약속 중에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한다는 약속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제가 되어 그의 모습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이루어야 할 최후의 과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따르는 자가 언제나 눈 앞에 가지고 있고 그 앞에서는 다른 모든 형상들이 자취를 감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에게 침투되어 그들을 채우고 변화시켜 선생을 닮고 아니 선생과 같이 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일상 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의 모습에 아로새겨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제자들이 죽은 사람의 그것 같이 한가히 바라보며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습에서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솟아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순종하는 자는 그의 모습을 반드시 지닌 자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같은 형상의 숨은 형제요,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피조물인 아담에게서 볼 수 있는 자신의 형상을 만족하여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창세기 131)고 하셨습니다. 아담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주와 같다는 사실은 태초 이래 풀 수 없는 인간의 비밀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다”한 것입니다(창세기 126). 그러므로 그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과 같다는 비밀을 감사와 순종으로 지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먼 목표요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행동과 노력으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뱀의 속임수였습니다. 이 때 아담은 은혜를 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선택했었습니다. 피조물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같다는 자신의 본질적 비밀을 스스로 풀어 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지으신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자기 멋대로 ‘하나님과 같이’(sicut Deus)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으로 받들고 그 결과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홀로 창조신이 됨으로 하나님(God)이 없는 무의미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풀려던 수수께끼는 역시 풀지 못한 채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나님과 같은 자신의 본질을 인간은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라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 정의(定義) 없이 인간은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아닌데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 수 없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의 모순이며 모든 고난의 근원입니다. 그 이래 아담의 오만한 후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모습을 자신의 힘으로 되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다시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진지할수록, 희생이 크면 클수록, 노력의 결과가 그럴 듯하여 자랑이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모순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만든 그들의 잘못된 모습은 부지중에 점점 사탄의 형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주의 은혜인 하나님의 형상은 이 세상, 그들에게서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잃어 버린 자신의 피조물을 아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자신의 형상을 그들에게서 창조하시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조물에서 그분은 다시 만족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것을 피조물에게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찾는 길은 큰 자비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세상의 실상과 형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결국 사람의 형상을 입어야 하셨으니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인간에게서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알아야 할 것은 부분적 재건이 아니고 ‘전체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옳은 생각을 다시 가져야 한다든가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다시 정정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새롭고 살아있는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혼과 영이 지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만족은 오직 완전한 자신과 같은 모습에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은 생명에서, 살아있는 원형에서 형성됩니다. 형상은 형상을 낳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형상을 형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형태를 하나님의 형상에 맞추어 빚어 만든 살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일 것입니다. 만일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얻으려면 형상의 ‘변화ㆍ개혁ㆍ변형’(로마서
122┃고린도후서 318)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직 죽는 길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버지 곁에 거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그 형상을 벗고 종의 모양으로 인간에게 온 것입니다(빌립보서 25∼).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없는 형상의 변화가 하나님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것으로 있을 하나님의 형상이 이제는 죄짓고 타락한 인간의 형상을 입었으니『...하나님께서...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세상에 보낸 것입니다(로마서 83∼). 도움은 오직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냈다는 데 있을 뿐입니다. 어떤 새 이념도 더 나은 종교도 이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한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은 각기 형상을 가지고 있으니 몸과 생명이 밖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한갓 말이나 생각ㆍ의지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모든 점에서 사람됨을 말한 것이니 한 형태요 형상이며 형제입니다. 그에게서는 새 생각, 새 뜻, 새 행동뿐 아니라, 새 형상, 새 형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죄의 육신과 같은 형상을 입고 저주받은 우리 인간 생활을 몸소 체험하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가르침과 행동, 생명과 죽음에서 그분의 모습은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그분에게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땅 위에 다시 창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되심과 말씀, 행동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모두 이 형상의 소속입니다. 낙원에서 첫 영광 중에서 살았던 아담의 것과는 그 모습이 다릅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세계에 오신 분의 모습이며 육신의 곤고를 스스로 맛보시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겸손히 받았으며 죽음과 수난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분의 모습입니다. 가난에서 탄생하셨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그들과 식탁을 같이한 분이며, 하나님과 인간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버림을 받고 외로이 홀로 남은 이 분의 이 모습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새 형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수난의 표지인 십자가의 상처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에서 은혜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모습은 하늘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영광 속에서 계속 생생합니다.
  주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순절 아침에 새 몸으로 변하여 하늘의 밝은 형상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1)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주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참여하려면 먼저 십자가를 지고 순종의 고난을 당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지니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서 부끄러운 십자가의 형상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지 않고는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을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이 형상에 하나님의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는 자만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어떤 이념의 실현에 절망함으로 그에 대치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빚어 같은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에게서 형상을 얻으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갈라디아서
419). 이 형상은 우리 중에 나타나려는 형상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내기까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형상은 곧 인간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신 분의 흠 없는 모습인데 이 형상과 같이 우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다 하였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신 그의 인간성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이 되도록 그분은 그들과 같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임함(성육成肉)으로 전 인류는 하나님의 품위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형제에게 학대를 할지라도 그것은 그분이 전 인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얼굴만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한 예수 그리스도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분과 공동 생활을 함으로 우리는 본래의 인간성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이 생활에서 우리는 사사로운 죄를 벗어나 전 인간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HanSaRang 註. ─ 잃어버린 참된 인간성을 되찾는 것, 이것이 사람이 ‘공부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교육을 받는 근본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에는 참된 인간성을 되찾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성경은 선포하고 있다(고린도후서 517┃갈라디아서 615).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대적하고 자기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하나님의 권좌를 차지하고 싶었던 사탄’에게 속임 당한 아담의 모습처럼 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교육은 밑이 빠져 버린 물통과 같다. “구원이 없는 교육은 저주일 뿐이다.”육체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여할 때 우리는 그가 지닌 전 인류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에서 우리 자신이 비로소 사람이 되고 사람으로 유지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새로운 인간성은 다른 사람의 곤란과 허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분이 자신의 제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형제가 되도록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으로 계시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디도서 34)이 땅 위의 모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이룩한 것입니다. 육체로 임하신 분의 형상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며 이 몸이 전 인류의 죄와 곤궁을 담당하고 유지하게 됩니다.

  지상의 그리스도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린 죽은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제자의 생명은 바로 이 모습으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요(빌립보서 310┃로마서 6423),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입니다(갈라디아서 219). 예수 그리스도는 침례를 베풂으로 받아들인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자신의 죽음의 모습으로 조각합니다. 육신과 죄에서 죽은 까닭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갈라디아서 614). 침례에서 산 자는 죽음에서 산다고 하겠습니다. 육신에 대항하는 정신의 싸움에서 날마다 죽는 죽음으로, 마귀가 그리스도인을 후려치는 죽음의 쓰라림과 날마다 당하는 고난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의 생명에 인장으로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며 또 모든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고생인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순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자격자는 제자들 중 소수의 무리일 것입니다. 이 소수의 무리에서 그들의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된 형상이 가장 잘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 없이 굴욕, 고난, 그리고 죽음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교회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례를 받은 이후 순교에 이르는 모든 고난은 같은 것이요, 같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신 분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새 창조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분의 공동체에서 살며, 그분의 형상을 이룬 자는 영광 중에 부활하신 분과도 같이 될 것입니다.『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진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49).『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한일서 3:2). 십자가를 지신 분의 형상같이, 부활하신 분의 모습도 그분을 바라보는 자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그분의 모습을 닮은 것이며 그의 형상과 같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의 거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를 통하여 이미 지금 반사됐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은 이의 형상에서 이 형상에 맞게 우리는 지금 고난의 십자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부활하신 분의 영화로운 생명이 솟고 빛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습이 점점 더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 중에서 점점 더 밝아집니다. 이렇게 점점 우리의 그분에 대한 인식은 깊어지고 더 맑아지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양은 점점 더 완전해집니다. 이것을 형상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부르십시오.『그러나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고린도후서 3:18).
  이것이 곧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은 이 세상에서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적 생활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생활입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인간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으며 영화로운 몸이 되신 분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삶을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립보서 1:21).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가,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삽니다. 이렇게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거처를 정하고 그를 충족케 하여 같은 형상으로 만듭니다.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를 지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한 그리스도는 또 각 사람에게서 자신의 형상을 이루고자 하니 그들은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상과 죽음, 부활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모습은 먼저 그분과 같은 형상이요(에베소서 424┃골로새서 310), 그 다음에 그분을 통하여 모든 지체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kaqwV CristoV)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kaqwV CristoV) 되라는 신약 성경의 거듭된 요구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으라는 것으로 파악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따르는 본(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친히 우리 중에서 실지로 우리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가 행하신 대로”(요한일서 26), “행한 대로”(요한복음 1315) 우리도 할 수 있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같이”(에베소서 52┃요한복음 13341512) 사랑하고, 그분이 “용서하신 것같이”(골로새서 313) 용서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는 생각”(빌립보서 25)을 품을 수 있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 준 한 본을 따를 수 있으며(베드로전서 221),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린 것같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우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한일서 316). 오직 그분이 우리와 같았다는 이유에서만 우리도 그와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분과 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같이”(kaqwV CristoV)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의하여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본으로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제적 행위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 생활이 순박한 순종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같은 생활입니다. 여기에서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생깁니다. 나 자신의 생명이나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새 모습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이 모습을 보려고 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다시 잃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거울에 나타난 어렴풋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가는 자”는 오직 앞에 가시는 대상만을 바라볼 따름입니다. 그러나 따라감으로,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된 자에게 다시 한 번 끝으로 다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에베소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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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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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구약성경의「레위기 23장」에는 일곱 가지 주의 명절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예언이며 미래에 대한 모형인데, 어떤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어떤 부분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명절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실체입니다(골로새서 216, 17). 그것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남자들이 정해진 때에 예루살렘에 와서 이러한 명절들을 지키면 그들의 가족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형식적이고 무관심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너희의 새 달들과 정한 명절들을 내 혼이 싫어하노라. 그것들은 내게 짐이요, 내가 지기에 피곤하노라.』(이사야 1: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주의 명절”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일곱 명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 4+3=7ː일곱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7은 완전함, 혹은 계시의 완성을 나타내는 수를 의미함.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50번 이상 나타나고 있음.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7이란 숫자로 계시해 놓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책이므로『일곱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음.) 
  
 앞의 4개 절기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면,「유월절」은 이집트에서 기원한 명절인데,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구속되고 구출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그 달 14일에 행하며, 이 바로 다음날에「무교절」을 행합니다(15일, 7일간 계속됨. ─ 레위기 2368 참조). 양은 14일에 마지막 시간인 해질 무렵에 잡아 유월절이 되고 무교절은 15일이 시작되는 날, 해가 진 뒤 즉시 시작됩니다.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는 빵(성도의 거룩한 행실을 예표함.)을 먹는 절기입니다. 두 명절 사이에는 간격이 없습니다. 유월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모형이라면 무교절은 성도의 생활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도의 거룩한 생활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없이 시작됩니다. 무교절 기간인 칠일은 거듭난 이후 성도로서 살아야 할 생활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은 그 달의 14일(7×2=14일, 안식일)이고 무교절은 그 다음날 15일인데 ‘안식일 다음날’이 됩니다(7×2+1=15일). 셋째 명절인「초실절」그 주에 “안식일 다음날”입니다(15+7=22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아침”, 주(week)의 “첫날”(일요일)에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첫 열매들(초실절이 예표가 됨.)이 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522, 23).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추수가 될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417). 하지만 초실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카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야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에 광야 시절에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초실절의 제물은 수확한 곡물 첫 열매들의 한 단이었는데, 이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그는 주님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었고, 그 뒤에 번제와 음식제사와 술붓는 제사가 따랐지만, 속죄제는 없었습니다. 번제는 1년 된 흠 없는 어린 숫양을 드렸습니다. 제사장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도 성전의 찢어진 휘장 앞에서 첫 곡식단을 흔들었지만 그것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체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비어있는 요셉의 무덤은 “첫 곡식단(예수님)”이 이미 수확되어 하늘의 성전 안에서 흔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성취하셨기 때문에 천년왕국에서는 초실절이 없을 것입니다.
  
초실절부터 50일이 지나면「오순절」입니다. 이 사이에는 ‘일곱 안식일’이 있으므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오순절도 “안식일 다음날 아침”에 지켜졌습니다(7×7+1=50일). 그것은 보리 수확기인 초실절에서 시작하여 밀을 거둬들임으로 끝났습니다. 첫 날은 초실절이며 마지막 날은 오순절이었는데, 첫날과 마지막 날만이 절기로 지켜졌습니다. 오순절에는 주께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으로(새로운) 음식 제사를 드렸습니다. 초실절에는 곡식단을 흔들었으나, 오순절에는 낟알로 갈아 만든 가루에 누룩을 넣어 구운, 두 덩어리의 ‘빵’을 드렸습니다. 두 덩어리의 빵은 교회를 형성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두 부류를 나타내며, 누룩은 비록 구원은 받았지만 불완전한 성도의 결점과 죄를 상징합니다. 오순절에는 1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일곱 마리와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두 마리의 번제물을 음식제사와 술붓는 제사와 함께 드렸는데, 이것은 불로 드리는 제사로서 주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습니다. 또 숫염소 새끼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렸으며, 1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화목제의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또 흔드는 빵이 주께 흔들어졌습니다. 여기에서 ‘곡식단’이 아닌 ‘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빵은 교회의 동질성을 나타냅니다. 오순절은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에 의해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213). 오순절과 나팔절 사이에 낀 4개월 동안에는 곡식과 포도의 수확물을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쁜 이 기간에는 함께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 긴 기간은 성령께서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모으시는 현재의 시대를 상징하며,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면 이 은혜의 시대는 끝이 나고(로마서 1125), 이스라엘 중에서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로마서 115) 예루살렘에서 나팔절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사방에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31).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글, “주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순절 아침에 새 몸으로 변하여 하늘의 밝은 형상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지식에 의하면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예수님의 부활로 표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초실절’과 성령님의 오심과 교회의 형성을 예표하는 ‘오순절’은 같은 날 지켜졌기 때문에(“안식일 다음날 아침”, 주(week)의 “첫날”) 이러한 표현을 한 것 아닌가 추측해 보았습니다. 왜 이러한 표현을 했는지 제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번역의 오류가 아닐까요? 성경적 지식을 바탕으로 추리해 보았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기를..

 절기에 대한 더욱 자세한 자료는『세대적 진리』(클라렌스 라킨/1920)를 참고 하십시오. [연결되어 있음.]

    NACHFOLGE
    by
    Detrich Bonhoeffer

    1965Korean b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Seoul
, Korea.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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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 

 

 

【  설교 듣기 】

날짜ː  2007. 9. 9.오전
▶ 제목ː『 입으로 믿는 사람들 』(이 송오 목사)
성경구절ː〔 이사야 291316
시간ː4658
주소ːmms://211.200.28.142/bbc/20070909am.wma

날짜ː  2007. 9. 9.오후
▶ 제목ː『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이 송오 목사)
성경구절ː〔 에스겔 184
시간ː5138
주소ːmms://211.200.28.142/bbc/20070909pm.wma

날짜ː  2007. 3. 18.오후
▶ 제목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이 송오 목사)
성경구절ː〔 야고보서 22126
시간ː4920
주소ːmms://211.200.28.142/bbc/20070318pm.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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