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이래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는데, 그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을 때면 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⑴ 침례인 요한이 엘리야였다는 사실을 말씀하실 때(마태복음 11:15), ⑵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셨을 때(①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마귀가 먹어버렸고 ②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없으니 말라버렸고 ③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진 씨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미혹이 씨를 억눌러 열매를 못 맺게 했고 ④ 좋은 땅에 뿌려진 씨들만이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낼 수 있다.), ⑶ 에베소, 스머나, 퍼가모, 두아티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 교회들의 실상을 말씀하셨을 때도 역시 “귀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요한계시록 2:7, 11, 17, 29/3:6, 13, 2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귀야말로 복이 있다. 지역교회에는 다양한 계층의 성도들이 있다. 나이가 어린 유치부에서부터 초ㆍ중ㆍ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청장년부, 장년부, 노년부, 남녀 공히 다양한 경험과 삶의 수단을 가진 사람들이며 직장도 다양하다. 이들은 모두 영적 양식을 먹으려고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삶을 지탱하려면 빵이 있어야만 되지만, 영적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살 수 있다.『26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린도전서 1:26, 27).
세상 지혜로는 영적 양식을 공급할 수 없기 때문에 설교로 먹여주게 되는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이 교회로 유입되면 이 점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자연인이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첫째, 설교가 어리석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는 것이기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대학교수나 고급공무원이나 기업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면 그들의 사회적 경륜과 위상을 고려해서 집사나 장로의 직분을 부여하는 교회들이 있다. 교회로서는 그들을 교회에 붙들어 매어 고정 헌금을 받아내려는 의도도 있고, 그들로 인해 가족은 물론이요 지인들이나 직장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 해도 설교를 알아들을 수 없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디모데전서 2:4ː<개역성경>은 ‘진리의 지식’을 삭제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해서 자기 혼이 구원받지 않았거나, 구원받았다고 해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말은 영적으로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육신적 연령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영적 출생을 말한다.『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우리는 종종 개신교 목사들이나 교단 교인들을 만나 교제할 때면 언제 거듭났느냐고 묻게 되는데, 그들 중 90%는 그 날짜와 시간을 꼭 알아야 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나는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다. 그는 자기 생일은 잘 기억하고 있다. 혼인한 사람은 결혼 날짜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영적으로 태어난 날은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다.
회중이 목사의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그 교회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너 해라, 나 듣는다’로 형식적인 장사(?)가 한 시간 동안 있었을 뿐이다. 남는 것(구원받은 사람)도 없고 덕된 것(배우고 깨닫는 것)도 없이 다음 주일날 모인다는 재미없는 부담만 안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중이 설교를 알아듣지 못할 때, 목사가 설교를 제대로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교란 음식을 만드는 수고와 같다고 나는 우리 신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좋은 재료를 준비하여 맛있게 장만하고 먹음직스럽게 차려내서 식구들로 맛있게 먹게 해야 식구들이 건강해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교인들이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게 되자 음식을 장만하지 않고 지난번에 먹었던 음식을 다시 내놓게 됨을 알아야 한다. 지난번에 맛보았던 음식인 줄 알면서 맛있게 먹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먹지 않게 되는 것이다. 먹지 않게 되니 건강이 날로 피폐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어떤 남침례교회 목사가 만담을 하려 교회들을 돌아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교인들이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 양식을 받아먹을 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냄새나는 돼지 사료도 맛있다고 먹는 일이 소위 교회라는 곳에서 그런 코미디언에게 강단을 내어주며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목사가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놀이를 하게 되면 그런 일들이나 해야 한다. 어떻게 자신이 배우지 못하고 깨우치지도 못한 하나님의 일을 그가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 말씀은 그런 실상을 알기에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3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4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로 돌리리라』(디모데후서 4:3, 4).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복이 있는 사람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려 교회라는 곳을 찾았는데, 말씀은커녕 거짓 교리만 듣고 나왔다면, 그것은 생수를 마시려다 구정물을 들이키고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신기루는 신기루일 뿐, 정작 입에 들어온 것이 없으면 더 많이 허기지게 된다. 영적 양식을 공급하지 않는 강단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신실한 성도라야 영적으로 풍성한 교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인터넷 신문 ‘바이블 파워’ (2008-5-26) ... ────────────────────────── Bible Believ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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