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2. 16:29

“ 나쁜 아버지 ” (양육/성장)

(양육/성장) [20070617] ●『 진짜 남자 』(제8장ː나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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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aceful Hymns on Violinㆍ잔잔한 찬송가 바이올린 연주 모음┃(53:39)

● 나쁜 아버지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겨울, 강 위를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있었다. 그는 강 위에 떠 있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 앞에 가파른 폭포가 있는데도 잠시 쉬기 위해 얼음 덩어리 위에 착지했다. 그 독수리는 얼음 덩어리가 폭포에 떨어지기 전에 날아갈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수리가 얼음 위에 서 있는 동안 그의 발이 거기에 얼어붙고 말았다. 얼음 덩어리가 폭포수에 가까워지자 독수리는 날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이 옴짝달싹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독수리는 얼음 덩어리와 함께 폭포수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독수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조치를 취하기까지 너무나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들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모든 일이 순조로워 보이는 이상 얼음 덩어리를 타고 가는 데 만족한다.
  여기 아주 흔한 시나리오가 있다. 엄마가 아빠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 아들과 대화 좀 해야겠어요. 그 녀석이 요새 얼마나 건방져 졌는지 몰라요. 날 너무 힘들게 해요. 하지만 아빠는 아들을 직면하고 감정적인 말다툼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이 학교에서 정학 당하거나 체포되지 않는 이상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모든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이따금씩 반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문 뒤에 숨거나 다시 TV 채널 서핑을 한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다시 혼자서 아들을 엄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그러다 아들이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켰거나 학칙을 위반했다는 전화가 오면 그제야 아빠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난다. 이제 아들을 유치장에서 석방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라고 의아하고, 당황해 하며, 큰 좌절감에 빠진다.
  만약 그 시나리오가 당신이 자녀들과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묘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더 나은 자녀 양육 방법을 보여주고 싶다. 당신이 자녀들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지내기에는 너무나 바쁘거나 너무나 지쳤다는 등의 변명을 뛰어넘도록 돕고 싶다.
  또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이 실제로 여자의 일이라는 그릇된 관념도 깨고 싶다.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자들이 아이 키우는 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

  그렇다. 하지만 당신도 자녀들을 양육하도록 만들어졌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을 키우고 양육하는 문제를 논할 때, 주로 아버지에게 명령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들에게 자녀들을 진리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분이 마음속으로 염두에 두셨던 더 큰 목적을 보여주겠다.
(에베소서 6:14)절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1 ○ 자녀들아,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째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되고 또 땅에서 장수하게 하려 함이니라. 4 너희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

  사도 바울은 남자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로마 사회의 배경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었다. 아내들은 아버지의 발 밑에 노예와 같았고,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로마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로든 자녀를 원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태어날 때 그를 버릴 권한이 있었다. 아버지는 버리고 싶은 아기를 로마 공회에 데려가서 땅에 눕힌다. 그러면 누군가가 지나가다 그 아기를 창녀나 노예로 키우기 위해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요! 그런 일은 너무 심하군요. 나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들에게 신체상 상처를 절대로 주지 않을 많은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은 자녀 양육과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침묵함으로써 이들을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버리고 있다.
  아버지는 나가서 일하거나 교제하느라 너무 바쁘다. 집에 있다 하더라도 세부사항에 별로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TV를 보도록 하는 것이 더 쉽다. 너무나도 흔히 아버지도 TV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관심한 아버지 노릇으로 우리가 얻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양육되는 아이들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엇을 하라고 타이르기는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말로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자녀들이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이들은 죄를 짓는 성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 거짓말하거나 이기적인 되는 법 따위는 한번도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그것에 이미 통달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가르침

  에베소서 6장의 첫 세 구절을 읽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멘. 형제여. 계속 설교하세요. 우리 집 애들도 이 말씀을 읽었으면 좋겠네요.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안에서하라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자녀를 제대로 양육할 것이라면 주님의 것으로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당신의 자녀에게는 올바른 정보와 적용이 있어야 한다. 그들을 혼자 내버려두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면 TV나 또래 집단이나 세상적인 교육자나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지도할 것이다. 즉 이들은 어딘가에서든 인생에 대해 배우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 때까지는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부터 성경대로 믿고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 아버지인 우리의 과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그분께 복종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자신을 두는 것이 복종(submit)의 정의이다.
  
자녀들이 언젠가는 우리 권위 아래서 살다가 독립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는 늘 살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이 단어가 중요하다. 실제로 이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직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도 어떤 사람의 권위 아래 있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세요! 문제는 현대 세계에서 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엄마나 아빠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조차도 싫어한다는 점이다. 우리 자녀들은 ‘반항’을 본으로 보여주고 격려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사실이 당신과 나를 걱정하게 만든다면 아버지로서 그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실제로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데 자신을 헌신하는 것만으로도 반은 이긴 것이다.

존경은 당신에게서 시작된다

  에베소서 6 2절’은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다. “존경, 공경(honour)이라는 단어에는 별로 신비로운 것이 없다. 그 단어에는 존중하거나 공손함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뜻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존경을 요구하셨다. 이제는 나도 할아버지인데도 아버지의 집에 가서 그분을 지나치게 편하게 대하지 못한다. 하이, 아서! 잘 지내요? 나는 정말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아마 아버지는 나를 뻔히 쳐다보실 것이다. 아버지라고 말씀드리던지 내가 그분의 지위를 존경한다는 표시가 될만한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어른이고 자녀는 아이이며 그들이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때가 되면 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 그 동안 우리 아버지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일관성 있게 존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우리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에 따르면 좋은 이유가 여러 모로 있다고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이것이 옳으니라.』(에베소서 61)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다. 나의 방식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면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래서 내가 기쁘면 너를 축복하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그분 자체가 올바름의 기준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방식대로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옳다.
  둘째로, 이 말씀에 장수의 약속이 덧붙여 있다. 바울은 십계명이 주어진 장면이 나오는 ‘출애굽기 20장’을 되돌아본다. 계명의 목록을 읽어보면 첫 네 계명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너는 내 앞에 다른 어떤 신들도 있게 하지 말지니라.』(3절) 또는너는 어떤 새긴 형상도 네게 만들지 말고 또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4절) 등과 같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계명은 가족을 다루기 때문에 전환점이 된다.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출애굽기 2012a). 그 다음에 이런 약속이 주어진다.『...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 위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2012b) 그리고 나머지 계명은 개인 관계를 다룬다.
  
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는가?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집안에서 제대로 양육된 아이들이 사회를 강화시키는 구성원이 될 것임을 아셨다. 만약 권위와 존경, 그리고 공경이 집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동네에 결코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동네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면 지역 사회에도 결코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지역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도시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도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주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주로 영향력이 파급되지 못하면 전국에 영향력을 퍼뜨리기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빠가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한 아이가 결국 나라 전체를 붕괴시킨다. 우리는 그 문제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우리는 냄비 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물이 점차적으로 끓어 오른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그것에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한 아이가 부모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미합중국을 파멸시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어린 아이들이 천오백만 명이나 이천만 명이라면 어떻겠는가!
  ‘
에베소서 6 2, 3절’ 말씀은 존경심이 우리 자녀들의 예절을 세련되게 하거나 무례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가르치는 어떤 훌륭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존경심은 말 그대로 그 안에 삶과 죽음의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잠시만 시각을 바꿔보자. 우리가 아버지로서 존경받을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부모에 대한 존경 지수를 측정해보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존경은 두 가지 기본적인 것들을 뜻한다. 우리 부모를 존중하고, 공경심으로 대하는 첫 번째 개념은 이미 언급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어른이라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부모님을 마음대로 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에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모님과 의견을 달리할 때도 정중히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존경심이 의미할 수 있는 두 번째 개념은 재정적인 원조와 개인적인 보살핌이다. 나는 그리스도인 남자들이 부모를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곧 우리가 자녀들에게 도움을 받을 차례도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목적

  계속해서 ‘에베소서 6 4절’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뒤로 돌아가겠다. ‘가정 안에서 얼마나 질 좋은 영적 교훈을 받았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운명이 크게 좌우된다’는 생각을 다시 논해보자. 하나님께서 아버지들에게 진리 안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분이 염두에 둔 더 큰 목적을 보여주고 싶다.
  ‘
신명기 6 4절’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이 진리에 관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말씀일지도 모른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독특함에 대한 선포이다.『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 분 시니.』(신명기 6:4). 예수님에 따르면 그 다음 구절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말씀이라고 하신다(마태복음 2237 참조).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할지니라.』(신명기 6:5).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 다음에 명령하시는 말씀을 주목하라. 내가 그 말씀을 요약하겠다.

아버지들이여. 지금 집에 가서 나의 진리로 자녀들을 양육하라. 그들이 일어날 때나 누워있을 때나 깨어나고 잠자리에 드는 사이의 시간에 그 진리로 가르치라.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가르치라. 나의 진리를 그들의 이마에 붙이고 다니기 바란다. 그들이 집에 들어올 때나 떠날 때나 나의 진리를 항상 기억하기를 바란다. (신명기 6625 참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른 모든 나라들과 다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진리와 공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그들 주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토대로 세워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아이들조차 이웃에 사는 다른 아이들처럼 행동한다. 전 자니를 사랑해요. 그래서 혼내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부모들도 있다. 실례지만, 그런 태도는 그를 미워한다는 표시나 다름없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시라고 말씀하는지 아는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산채로 가죽을 벗기신다. 이것은 내가 ‘히브리서 126절’,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을 각색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징계하신다는 말씀이다.
  
나의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명령하셨다.  10시까지 집에 들어오렴. 10 1분도 안된다. 10시까지 들어오든 나에게 혼쭐이 나든 둘 중 하나야! 그러면 나는 화가 나서 왜 밤 10시까지 돌아와야 하나요? 친구들이 놀려요. 걔들은 새벽 2시나 3시까지 밖에서 놀아도 된단 말이에요. 그러며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걔네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관심이 없으신가 보다. 하지만 난 관심이 있어. 10시까지 들어 와.
  
한번은 내가 자랐던 볼티모어에 갔는데, 그 친구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가? 아직도 새벽 2시나 3시까지 집 밖에서 놀고 있었다. 내가 오늘날 목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를 단속하시고, 훈계하시며, 항상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신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것도 그 덕분이다. 나는 그 친구들의 정신을 쏙 빼놓았던 마약 등에 빠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와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녀들의 힘을 북돋거나 그들을 파괴할 수 있다

  ‘에베소서 6 4절’을 살펴볼 준비가 되었다. 훌륭한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을 화나게 하거나 흥분하게 만들면서 그들이 제대로 자라기를 바랄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아버지인 나는 사도 바울이 왜 유독 아버지들에게 말했는지를 알 것 같다. 같은 조건이라면 아버지가 가장 먼저 화를 내고, 자녀들을 심하게 혼냄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들은 이렇게 자문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자녀들을 화가 나게 만들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과잉보호하거나 숨 막히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대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많은 책임이 있지만, 당신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언급하긴 해야 한다.
  
편애도 자녀들의 기를 죽일 수 있다. 왜 형처럼 할 수 없는 거냐? 한 아들은 운동을 잘하고 또 다른 아들은 더 예술적일 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비교하고 싶은 유혹이 강할 것이다. 당신은 남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들을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지극히 당신의 기호일 뿐인 잣대를 세워두고 말이다.
  
또는 당신이 실현하지 못한 꿈을 자녀들에게 강요함으로 그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다. 아들아 나는 곤충학자가 꿈이었는데 못 됐어. 그러니까 네가 곤충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곤충을 싫어한다면 어쩔 것인가?
  
낙심시키기’, ‘비판하기’, 그리고 ‘칭찬하지 않는 것’도 우리 자녀들을 노엽게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다. 자녀의 소망과 꿈을 망쳐놓지 않도록 조심하라.그들이 하지 못하는 것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 않도록 노력하라.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
  
이제 우리 자녀들을 격노하게 하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언급해야겠다. 이는 신세대 부모의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희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지금 당장 내 욕구부터 채워야 한다. 그런데 네가 내 길을 가로막고 있다. 라고 말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현대의 많은 아버지들이 보기에 자녀들은 실제로 걸림돌이다.
  
고맙게도 ‘에베소서 6 4절’은 이면이 있었다.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해야 한다. 그들을 훈련(train)시키며 훈계(discipline)하고, 가르쳐야 한다.
  
훈련과 훈계는 자녀들에게 규칙을 주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벌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분명히 해야 하고, 자녀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상황을 조성해줘야 한다.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것은 아버지 자신이 말씀 그 자체로서 스스로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녀에게 당신의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룰 수 없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밖에 없다면 그리스도인 가정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방법을 알아내고 싶지 않다면 그런 가정을 이룰 수 없다!
  
아버지들이여! 성도들의 노력이 당신의 수고를 뒷받침하고 향상시키는 교회와 자녀들에게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라!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자녀들이 당신을 공경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지만 그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의향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그렇게 하면 당신과 자녀들의 일이 잘 될 것이다!『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 (여호수아 1:8).

훌륭한 남자/나쁜 아버지

  이제 화제를 바꿔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 선지자와 그의 두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사무엘상 24)를 살펴봄으로 교훈에서 사례로 넘어가겠다. 소제목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엘리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보여준 나쁜 본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 관한 슬픈 이야기는 아주 어린 나이에 엘리와 함께 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진 어린 사무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룬다.
  
그 이야기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임신을 못하여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부르짖었다. 만일 주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면 그 아이를 일평생 동안 주님만을 섬기도록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사무엘이 젖을 떼자 한나는 실로의 성전에 있는 엘리 제사장에게 그를 데려다 주었다. 그래서 여기 어린 사무엘이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가 사는 방에서 복도를 내려가 보면 홉니와 피느하스의 침실이 있었다. 이들은 주님을 일체 상관하지 않던 엘리의 쓸모없고, 사악한 아들들이었다(사무엘상 212). 이들은 아버지가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말썽을 피우는 설교자의 아이들이었다.

소극적인 아버지는 통제하기 힘든 자녀들을 만든다

  우리가 엘리의 가족을 만날 때쯤 그 아들들은 그의 성전 사역을 돕고 있었다. 그들은 매주 주일날마다 아버지와 함께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겉치장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성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형제들은 부정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헌금 바구니의 돈을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훔치는 것은 돈뿐만이 아니었다. 제사장의 정당한 몫보다 더 많은 제물을 가져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들을 사기죄로 고소했다면 엘리는 힘으로 협박을 당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아들들은 경배드리러 오는 여자들을 성전 입구에서 유혹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이런 말을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제발 엘리가 아버지로서 제대로 한 일, 또는 하지 못한 일을 가르쳐주세요. 그래야지 엘리를 반면교사(反面敎師ː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로 삼지요. 여하튼 엘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들을 제대로 훈계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들은 성전 주위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온갖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식료품 가게나 쇼핑몰에서, 어떤 부모가 소리를 질러 대며 보채는 밉살스러운 2살짜리에게 , 자. 얘야, 그건 하지 말자. 그만 하자.고 말하는 것을 얼마나 자주 들어보았는가? 부모가 그러는 동안 그 아이는 온통 난장판을 만들고 있었다. 엘리는 이런 식으로 어린 홉니와 피느하스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 어땠는지 세부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무엘상의 결론은 이것이다. 즉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악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엘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가 실제로 이들을 훈계해보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23 그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가 그런 짓을 하였느냐?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이 온 백성에게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 말라. 내가 좋지 않은 소문을 듣나니, 너희가 의 백성으로 범죄케 하는도다. 25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재판관이 그를 판단할 것이나, 사람이 를 거역하여 죄를 지으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청하겠느냐? 하였으나 그래도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음성에 경청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께서 그들을 죽이고자 하심이었더라. 』(사무엘상 2:2325)

  엘리는 그의 아들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과 말을 하는지 듣고 이렇게 말했다. , 얘들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안 돼. 그런 행동은 나쁘다.
  
아들들은 , 아빠라고 말한 다음 곧바로 성전에 오는 사람들에게서 다시 돈을 훔치고 여자들을 학대했다. 모든 징후로 보아 엘리는 그저 그들에게서 돌아섰다고 한다(사무엘상 31214 참조).

그냥 서 있지 말고 무언가를 하라!

  문제는 엘리가 자녀들에게 올바른 행실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올바른 행실을 가르치기는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르침들을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자녀들에게 밖에 나가서 은행을 털어라. 죽일 사람을 찾아라. 감옥에서 10년이나 20년 정도 보내 보는 것도 너희에게 좋다.라고 말하는 부모를 본 적이 없다. 당신도 그런 부모를 본 적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부모들은 아마 엘리가 그랬듯이 올바른 충고를 할 것이다. 많은 죄수들의 부모들도 아마 올바른 충고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의의 가정교육에서 너무나 많이 간과된 것이 우리 신념의 힘을 상징하는 강제(强制ː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 의사를 억누르는 것.)이다.
  
엘리는 진리를 강제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을 뿐이다. 그는 아들들의 직위를 해제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의 성전 출입권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빼앗지도 않았다. 엘리는 아들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멈춰야 한다고 형식적으로 투덜대기만 하면서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내 버려두었다.
  
훈계는 자녀들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타이르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전에 논의했다. 타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 자녀들이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죄인들은 불가피하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나의 아들이 어렸을 적에 불을 만지고 싶다고 했을 때 그에게 불에 손을 갖다 대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그가 불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것을 만지지 못하게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중에 불을 만져보지 않으리라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구체적인 제지로 나의 충고를 강제했다.
 
 자녀의 행동을 바로잡는 데는 올바른 말 그 이상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결과를 얻고 싶다면 사랑 안에서 자녀들을 훈계해야 한다. 훈계는 히브리서 12 6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의 시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거나,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이웃 아이들이 잘못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은 나의 가족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사랑하듯이 당신이 자녀를 사랑하길 원한다면 훈계하고 그들의 행동을 바로잡기도 해야 한다.
  
사랑이란 무언가를 말하는 편이 더 좋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부모나 영적 지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행동은 바로 사랑 안에서 훈계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 8절’에서 아버지와 집안에서의 훈계에 관해 정곡을 찌른다.『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
  
근처에 사는 아이들이 당신의 집을 방문해서 마치 그곳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자녀들이 놀기 위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온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얌전하다. 집에 들어와서 원하는 것은 물 한 잔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마침내 우리 아이의 엄마는 그곳이 호텔이 아니며 그녀가 호텔 종업원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웃 아이들이 그 자유를 누릴 정당한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당신의 자녀들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집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대신 이들은 또 한편으로 당신의 훈계를 들어야 하기도 하다.

훈계 또는 파멸

  성경에서 피할 수 없는 원칙 중의 하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벗어나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죽거나 무덤으로 직행할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논하고 있는 바는「영적 죽음」이다.영들의 아버지(히브리서 129)는 영적 생활에 대한 책임을 지신다. 당신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영적 죽음의 영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를 하나님과 더 가깝게 하거나 멀어지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분의 훈계이다. 그분이 징계하실 때 우리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을 섬기기 않겠습니다.라거나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어떤 좋은 아버지처럼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때가 온다. 나의 규칙을 지키고 싶지 않다면 나의 집에서도 살 수 없다.
  
나의 형은 메릴랜드 주에서 무한 체급 레슬링 챔피언이었다. 형은 덩치가 상당히 컸고, 몸 전체가 거의 근육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형을 꾸짖었는데 형이 화를 냈다. 형은 주 레슬링 챔피언인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은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형은 원할 때 집에 들어오고 싶었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형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얼마나 높이 뛰어야 하는지 명령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명히 말했다. 이 집안에서 사는 한 규칙은 내가 정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면 나의 규칙에 따르든지, 아니면 밖에 나가서 혼자 힘으로 먹고 살아라.
  
형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집을 떠날 거예요! 이 따위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구요!
  
그래서 형은 짐을 싸서 우리 집을 나갔다. 한 15시간 뒤, 그는 집에 돌아오고 싶어서 현관 앞에 와 있었다. 거리에 나가보니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돈도 직장도 차도 없었다. 친구들에게 함께 살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그들은 집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투덜대기만 할 뿐 그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정말 살만한 곳은 집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 형은 돌아왔고 아버지께 복종했다. 그가 거리에서 받았던 메시지는 진정한 삶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짜 삶은 주님 안에서 그를 사랑하고 훈계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안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곳은 바로 삶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아들들이 자신의 법대로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자신의 집 안에서 살 수 없다고 결정하셨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징계는 단순히 거리에 나앉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엘리의 아들들은 도가 지나쳤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제거할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죽음이 예언되었고(사무엘상 234),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았을 때 엘리의 아들들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아버지인 엘리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죽고 말았다(사무엘상 417, 18 참조).
  
엘리가 부모로서 실패하자, 이는 친인척을 포함한 가족 전체의 파멸로 이어졌다(사무엘상 41921절). 그리고 사무엘상 4을 전부 읽어보면 이 일이 한 가족의 참극을 뛰어넘었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사건은 한 집안에 들어온 “죄”가 어떻게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재난이 되었다. 피느하스의 아내에게 태어났던 아들의 이름이 이 모두를 상징한다. 이카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사무엘상 421 참조).

경건한 가정으로 이끌기

  이 모든 일에 비추어서 볼 때, 우리는 아버지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랑 안에서 진리를 강요하고, 훈계하며, 징벌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관하심 아래 일관성 있게 행동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하지 말고 말이다. 그녀는 이름하여 아들을 계속해서 부르는 어머니였다.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그냥 무시해버렸다. 한동안 그러다가 마침내 그와 함께 놀던 친구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네 엄마가 부르시잖아. 집에 안 갈 거야?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이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을 불렀을 때, 그가 실제로 들어오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도록 길들였다. 그녀가 실제로 의미한 바는 네가 언젠가 결국 집에 돌아올 것으로 이어질 과정을 지금부터 시작하고 있다였다. 이것은 잘못된 메시지다. 엘리가 보여주듯이 흔히 실패한 아버지의 최후는 좋지 못하다. 그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하시는 그분의 징표인 언약궤를 강탈하는 것을 볼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 사건이었다.
  
아마 지금쯤 당신은 약간 압도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격려가 되리라 생각하는 영적 비유를 들겠다. 세상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성공적으로 해냈던 일을 지금도 똑같이 우리에게 하고 있다. 세상은 우리 집에서 그분의 영광, 그분의 임재하심, 그분의 능력인 하나님의 궤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그들의 무기가 검과 창은 아니지만 전투는 그때처럼 치열하다. 어두움의 세력들은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와 같은 신무기를 사용하여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가치관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게 만들려 하고 있다.
  
당신과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 아버지들의 해야 할 일은 우리 집안에서 앞장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녀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6 1017을 읽고, 우리에게는 알맞은 무기가 있으며, 우리 편이 이미 승리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라.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할 것이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자녀들은 올바른 행실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람을 기꺼이 따른다. 아버지들이여, 가족을 이끌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자!

토니 에반스 /『 진짜 남자 』(제8장ː나쁜 아버지) ...

    No More Excuses (원제: 변명은 이제 그만)
    By
    Tony Evans

    Copyright ⓒ 1996 by Evans, Tony
    Published by Crossway Books
    a division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linois 60187, U.S.A.
    All rights reserved.

    Used and translated by the permission of Crossway Books through
    the arrangement of KCBS Literary Agency, Seoul, Korea.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6 by Infiniss, Seoul, Korea.

[  8장ː나쁜 아버지 ]

【  생각하기.... Thinking... 】

  우리가 외국에 나갔거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들어왔거나 그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왜, 한국인은 외국에서 추한 행동을 하고 외국인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조폭행위들을 하는가? 당연히 징계를 받아야 하고 징계를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인류가 원숭이에서 진화됐다는 진화론 숭배자들이여! 어디 한 번, 그러한 허황된 이론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어 보시오! 인간은 스스로 향상되고 발전된다는 진화론에 근거해서 아이들을 바른 훈계와 지도없이 하고 싶은 대로 나둬 보시오. 그러면 아이들은 진화되어서 자동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오? 그러면 이 세상에 죄와 악은 왜 존재하는 것이오? 그러한 것들이 진화의 과정이오? 오로지 자신만을 환경에 적합시켜 생존시키기 위해 거짓말하거나 이기적으로 행하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선(善)이 되는 것이오? 그렇게 되는 것이 옳은 것이오? 하나님의 심판받을, 어리석은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여!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와 인내없이 어찌 인간사회가 운영된다 말이오! 이 어리석은 진화론 추종자들이여!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이러한 속담은 바른 진리가 아니오!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한 번 설명해 보시오! 결국은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주 교만하고 거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마음 때문에 그러한 허황된 것들을 주장하는 것 아니오! 제발 올바르고 정직한 삶을 살란 말이오! 어리석은 진화론자들이여! 한 덩이의 먼지에서 탄생한 우주가 진화되어 간다느니, 인류가 현재도 진화된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성경의 기록들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싶은 ‘미친 마음’ 때문에 지금도 헛된 연구를 하는 것 아니오!

 12 ○ 죄인이 일백 번 악을 행하고 그의 날들이 길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 곧 그분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잘될 것임을 내가 분명히 아노라. 13 그러나 악인은 잘되지 못할 것이며, 그의 날들도 길지 못하여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음이라. 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것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에 따라 당하는 의인들도 있고 또 의인의 행위에 따라 당하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말하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15 그리하여 나는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해 아래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사람에게 없음이라. 해 아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그의 생애의 날들 동안 그의 수고에서 그것은 사람과 더불어 있어야 하리라. 16 내가 내 마음을 써서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진 일을 보고자 할 때 (자기 눈으로 낮에나 밤에나 잠을 보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7 그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보았노니, 해 아래서 행해진 일을 사람이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라. 이는 비록 사람이 그것을 찾아내려고 수고할지라도 찾지 못하리니, 정녕 현명한 자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전도서 8:1217)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 가운데 이것이 한 가지 악이니, 곧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일이 있다는 것이며, 또 정녕, 사람들의 아들들의 마음이 악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간다는 것이라. 』

(전도서 9:3)

  김용옥 교수여! 어디 이것에 대해서 한 번 설명해 보시오! 성경의 기록들이 허구라면,,, 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영적 죽음을 당하는 것이오? 이러한 말씀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이오! 왜 그렇게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오! 김용옥 교수는 얼마나 인류를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소! 교수가 가진 고전학에 대한 지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 주었소! 교도소에 있는 죄인들을 얼마나 감화감동시켜서 그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었소! 사람은 왜 공부를 하는 것이오? 왜 수많은 책을 읽고, 쓰는 것이오? 이것도 진화되는 과정이란 말이오? 김용옥 교수는 왜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였소? 자신의 기억력과 습득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소? 김용옥 교수의 여러 행실들을 보면, 훌륭하고 존경스러움보다는 거만하고, 자만하고, 잘난 체하는 모습으로만 보이는데, 나에게는 왜 그러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오? 나의 마음이 어두워서 그런 것이오, 겸손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오? 요즘 들어서 고전에 대해서, 옛 사람들이 기록한 것들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옛 사람들의 소산들이 현 시대 사람들의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깊고, 넓고, 크고, 진지하고, 인생에 대해서 더욱 묵상할 수 있는 많은 영적 풍성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오! 시대가 지날수록 사람들의 영적인정신적인 수준이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김용옥 교수도 확실히 느끼지 않소? 물론, 나도 그렇게 느껴지오. 그런데, 자칭 고전학의 최고 권위자(?)라고 자랑하는 김용옥 교수는 왜 그렇게 사람이 가볍소! 왜 그렇게 선비답지가 않소! 선비가 무엇이오? 겸손하고, 지식도 풍성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부한 곳에 처할 줄도 알고, 가난한 곳에 처할 줄도 알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올바르게 분별하는, 인생에 대해서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을 말하는 것 아니오! 그런데, 왜 그렇게 천한 사람처럼 행동하시오? ─ (자칭 선각자라는 자가 카지노 도시를 만들자는 주장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철학자는 많은 사람들을 타락과 패망의 길로 인도하는 자인가? 과연 ‘건전한 생각의 영’을 가진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디모데후서 1:7)─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김용옥 교수도 그 혼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로 뿌림을 받아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 용서를 받고 지옥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진정으로 영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오. 진실로, 김용옥 교수의 혼에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하길 바라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소? 과연 창조주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통하지 않고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지 묵상해 보았소? 이 세상은 왜, 죄와 악이 존재하는지 묵상해 보았소? 모든 우주와 인간과 생명체는 왜 존재하는지 묵상해 보았소? 모든 생명체는 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소? 진실로,,, 정직하고 진실한 철학자가 되길 바라오...

14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15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 』

(히브리서 2:14, 15)

2007. 6....
HanSaRang...

  【 P. S. 】
 
 거짓되고 허황된, ‘미친 마음’에서 튀어나온 진화론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도올 김용옥 교수와 같이 성경의 기록들을 한갓 인간의 말로 여기는 사람들이 불쌍하고 답답하고 애통해서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표현이 거친 것은 양해 바랍니다.

 『 11 내 아들아, 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고 그의 나무라심을 싫어하지 말라. 12 이는 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꾸짖으시기를 마치 아버지가 기뻐하는 아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심이라. 』(잠 언 3:1112)

  학창시절에 대걸레 자루로 허벅지를 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

선생님의 징계의 몽둥이와 같은 말씀, 매운 회초리와 같은 말씀,

주님,,, 권능의 말씀으로 제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 책망하고
징계하여 주시옵소서.

 【 한국 속담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

  언제나 “지혜”는 자연의 법대로 흐른다. 밥상을 맛없게 차려 놓고

하나님이 그것을 맛있게 해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어리석게도 일생을 거짓과 죄악으로 소일하고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밖에 없다.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ː영국 비평가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들이여!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달려
나아갑시다
!

2007. 6....
HanSaRang...

『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8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히브리서 12:78)

romans8_19

(로마서 8:19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천부여 의지 없어서 ∼♪∼♬
[1121]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