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4. 23:12

“ 믿음의 좁은 길 ” (양육/성장)

(양육/성장) [20120126] ● 믿음의 좁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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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좁은 길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요한복음 16:13)
그러나 진리의 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다가올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

  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 확실히 일어날 일보다 더 두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어제 호숫가를 걸으며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제가 그 전날 교회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호소하는 내용의 설교를 들었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매우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고민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실 일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네.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지만, 실감이 나질 않아. 두려운 마음이 드네.”
  그는 그 모든 전통적인 대답(예컨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지” 혹은 “하나님은 네 두려움을 이해하고 계셔” 등등)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로는 확신하고 있었으나, 마음으로는 고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안 된 것은, 그는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꾸짖으면서, 자신이 변화할 힘도, 하나님에 의해 변화될 힘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헌신에 직면하기는 더 어려운 법인데, 그는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헌신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가 직면했던 그런 가능성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와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자기 나름의 괴로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상정하기로 합니다.
  몇 해 전에 아내와 저는 두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요한계시록 12112을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번 강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게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구절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다루고 있는데, 제가 이 구절을 설명할 때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동과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전의 졸저《믿음의 싸움THE FIGHT에서「사탄의 지옥 권세」라는 제목을 붙인 한 장의 대부분을 이 구절에 할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영적인 전투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쓰면서, 바로 제 자신과 가족을 그 영적인 전투에 끌어 넣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할 때마다, 보통 재난이나 사고와 같은 형태로 크고 작은 일이 아내나 아이들에게 일어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연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우리 부부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사건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습니다. 아내와 저는 이 일에 대해 기도하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히 느꼈습니다.
  우리는, 사탄이
‘삼키는 용’이요 ‘우는 사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런 능력을 지닌 사탄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우리 목숨을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는 것’임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자가 실제로 삼키는 경우보다 그저 울기만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첫 번째 목적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위협해 뒤로 물러서게 하고자 하며, 사탄은 그 때 분명 제가 그 특정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몇 달 뒤에 저는 영국 런던의 성 마가렛 교회에서 설교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소련이나 그 위성 국가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학생들로 들어찼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의료 협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에 온 학생들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사용하실 감동적인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런던에서 설교하던 그 날 밤, 캐나다에 있는 아내는 위중한 심장병으로 근처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생명이 위독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맏아들로부터 온 전화를 받은 저는 아내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알았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내의 상태가 심각하기는 했지만, 회의에는 계속 참가하면서 전화로 연락을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루나 이틀쯤 뒤에는 아내와 직접 통화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계속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고통을 당한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요한계시록 12을 설교하더라도 아무런 공격이 뒤따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구절을 여러 번 강해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내의 심장병은 4년 뒤에 신비롭게 치유를 받았습니다.
  어렵게 배운 교훈이지만, 저는 위협이 사탄의 특권인만큼 제 특권은 그 두려움의 문을 당당히 통과하는 것임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저는 진짜 전쟁에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진짜 피해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명을 확신하고 두려움의 문을 당당히 통과한다면 대부분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헌신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두려움의 문 앞에서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통과하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의 발걸음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붙어다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적으로는 성경적인 대답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을 상담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不信/믿음 없음) 때문에 의심이 계속됩니다. 골프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의심은 ‘평균 타수’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에 직면할 때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입니다. 제가 영적인 문제에 경험이 많을지 몰라도, 저 역시 여전히 의심의 공격을 받습니다.
  삶은 그 자체가 모험입니다.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우리는 얼마간의 위험(
risk)과 그에 따른 두려움(fear)에 직면합니다. 믿음이 아니라면 제가 무엇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공부해 온 과정을 제대로 골랐는지, 직업을 제대로 골라 지원했는지 어떻게 미리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적합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리라고 어떻게 미리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미리 알겠습니까? 지금 꼭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에는 무언가에 대한 신뢰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괜찮게 풀릴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나 신뢰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업가들도 모험을 합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세심히 연구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지는 못한 채 위험부담을 무릅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위험 부담이 개재되는 것입니다.
  물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빼면 신뢰의 태도라 하기 힘듭니다. 이들은 다른 가능성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이 됩니다.
  어젯밤 저는 캐나다
“스노우버드”(Snowbirds)의 편대장이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깜짝 놀랄 만한 대단한 편대 비행 기술을 보여 주는 비행대의 대장입니다. 이런 비행 편대의 안전율은 높지만, 일단 사고가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매우 끔찍합니다.
  작달막한 소화전같이 생긴 스노우버드의 대장은 반짝이는 눈과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비행 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그는 자기가 편대를 이끌면서 판단 착오를 일으킬 경우 나머지 비행기에 어떤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되지요?” 인터뷰하는 사람이 물었습니다.
“우린 실수 같은 거 안 합니다. 실수를 감당할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다면요?”
“전 그런 생각이 절대로 제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비행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생각이 절대로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어떤 가능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줄 정도로 신뢰할 수있는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스노우버드의 다른 조종사들은, 자기 자신의 기술과 집중력과 판단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대장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가 재정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금을 모금하는 자기들의 재주를 신뢰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첫 헌신이든 재헌신이든 헌신에 직면해 있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 때로는 정말 믿음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인 넓은 바다로 배를 띄우는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앞으로 폭풍이 불어올지도 모르는 데다 당신의 배는 작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얻을까요? 믿음은 얼마나 필요할까요?
  헌신의 삶에는 극히 작은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순종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에 극히 작은 믿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본문은 그렇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그래도 마르다는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주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21 마르다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여, 만일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실 줄 아나이다.”라고 하니』(요한복음 11:21, 22).
  주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이르셨고, 마르다의 믿음은 금방 실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르다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마지막 날에 부활로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니』(요한복음 11:24).
  무덤가에서 시험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돌을 치우라”고 명하셨고, 마르다는 금방 두려움을 느꼈습니다.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기에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39).
  마르다의 믿음은 얼마만한 것이었을까요? 완벽한 믿음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에게는 돌을 옮겨 놓을 정도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작을지는 몰라도, 한 걸음도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작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 한 걸음뿐입니다.
  믿음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고무줄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단련을 통해 확장되고 커지는 근육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발걸음은 하나님께서 근육을 단련시키시는 발걸음으로서, 그분은 근육의 각 단계마다 조금 힘에 부칠 정도의 연습량을 주심으로써 근육을 단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또는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믿음을 익히는 것은 파도타기를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당신은 작은 파도타기 보드를 빌려 해안 가까운 쪽에서 보드 위에 올라 연습을 할 정도의 믿음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선 요구하시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큰 파도가 있는 곳으로 데려 가실 때에는, 하나님께서도 친히 당신과 함께 그 큰 파도를 타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친밀함

  스노우버드의 조종사들은 대장을 친밀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여러 번 비행 전후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와 함께 수많은 시간을 비행했고, 조종사로서 그의 놀라운 기술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의 자신감과 느긋한 침착함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의 정확한 판단력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들은 일과 시간뿐 아니라 일과가 끝난 이후에도 그의 탁 트이고 따뜻한 성품을 지켜보며 그를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그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들이 더 친밀해질수록 더욱 자신있게 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편대 비행에서 핵심적입니다. 까다롭고 위험한 모든 비행 동작마다 그들의 눈은 계기나 지평선이 아닌 대장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순간에 그들은 오로지 자기 비행기와 대장 비행기의 정확한 상대적인 위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 비행대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은 대장(captain)입니다. 그들은 대장이 이미 산출해 놓은 결과를 자기들 스스로 계산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저 대장의 위치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맞추기만 하면 됩니다.
  조종사들은 목숨을 걸고 대장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대장을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나 제가 그 비행대의 조종사라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보다 그를 ─ 실수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 신뢰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단지 그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살아서 가까이 사귈 수 있기 때문이며, 반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무리 그분에 대해 많이 읽거나 들었다 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좀 함부로 말한 듯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성경을 인용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다가도,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비행 동작으로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 우리는 공포에 질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기 쉽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나누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신뢰는 그런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스노우버드의 조종사들이 자기 대장을 아는 것보다 더 친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큰 친밀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 관계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그런 친밀함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이 갈망은 모든 인간의 가슴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며, 인생을 겪으며 알게 된 두려움과 상처에 덮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망은 변함없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이 친밀함을 기를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바라며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배움을 도와줄 수 있는 책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책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저는 ‘조이스 허기트’(
Joyce Huggett)의《하나님께 귀기울이는 기쁨The Joy of Listening to God과 ‘빌 하이블즈’(Bill Hybles)의《너무 바빠서 기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Too Busy Not to Prey를 권하고자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신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파도에서부터 먼저 신뢰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바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나 헌신의 걸음, 십자가를 지는 걸음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가장 두려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이 당신을 귀중한 존재로서 진정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언약을 제시하시며, 당신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언약은 맺어진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의 영상을 멍에의 영상으로 바꿀 차례입니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마태복음 11:2830)

  누구를 부르고 계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입니다.
  무엇을 주겠다고 하십니까? 멍에, 쉽게 지고 갈 수 있으며 우리를 그분과 함께 묶어 주는 가벼운 멍에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파도타기 또는 비행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배움(
Study)은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배움은 일단 시작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는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는 과연 신뢰할 만할까요? 그분(
the Word)은 말씀하십니다.24:35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3:31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1:33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5:7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말씀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마태복음 24:35마가복음 13:31누가복음 21:33요한일서 5:7)

네 가운데 계신 너의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니 그가 너를 구원하실 것이요, 그가 기쁨으로 너를 즐거워하시리라. 그는 그의 사랑 가운데 안식하실 것이요, 그는 노래로 너를 기뻐하시리로다.   The LORD thy God in the midst of thee is mighty; he will save, he will rejoice over thee with joy; he will rest in his love, he will joy over thee with singing.(스파냐 3:17Zephaniah 3:17

“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 (여호수아 19).

 존 화이트/『 헌신의 기쁨ː(제9장) 』...

MAGNIFICENT OBSESSION
by
John White

Originally published by InterVarsity Press
as
Magnificent Obsession by John White ⓒ 1990 by John White
This is the expanded and revised edition of
The Cost of Commitment1976 by I.V.C.F. of the USA
Translated by permission of InterVarsity Press
P.O. Box
1400, Downers Grove, IL. 60515, USA
All rights reserved.

Korean Edition ⓒ 1998 by Korean InterVarsity Press
C. P. O. Box
1960, Seoul, Korea.

  (히브리서 2:10)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

『 너희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여기저기 달려서 이제 보고 알며, 거기 넓은 곳에서 찾으라. 만일 너희가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그 성읍을 용서하리라. 』

(예레미야 5:1)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치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Follow me.

romans8_19

(로마서 8:19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