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20. 01:19

【 제5화ː고결한 나귀 】

(윌슨의 잠언)[20090720]【 제5화ː고결한 나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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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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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ː고결한 나귀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도다.”(요한복음 12:15)   나귀가 결코 하찮은 짐승이 아니라는 걸 아십니까? 나귀는 인간사에서 소중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지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간 그 엄청난 영예를 누린 건 바로 나귀였으니까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왕좌에 오르셨어야만 했으니 이 짐승이 “왕의 나귀”였음을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한 구속받은 나귀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출애굽기 1313’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나귀의 모든 첫배 새끼는 네가 어린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네가 그것을 대속하지 않으려면 너는 그 목을 꺾을 것이며...』라고 말입니다. 이 나귀는 살도록 허락되었는데, 그러니까 그 나귀가 만약 첫태생이었다면 분명 어린양이 그 나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는 얘기가 되지요, 이렇게 해서 이제 그 구속받은 나귀는 잃어버린 사람들 대신 죽으셔야 할 하나님의 어린양을 등에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이 나귀를 위해 죽어야 함을 규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어린양(요한복음 129, 36)“들나귀 새끼”(욥기 1112)로 태어난 인간을 대신해 죽어야만 한다고도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린양”에 의해 구속받으셨습니까?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만이 그 “구속자”와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b)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나귀 같은 짓을 했군.”(바보짓 한 것을 개탄하는 말 ─ 역자 주)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까? 만일 그런 적이 없다면, 그건 다름아닌 나귀 본연의 자기 과시적 성품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두가 나귀와 같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그는 그들 중 하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14 ○ 잇사칼은 두 짐 사이에 구부리고 앉아 있는 강한 나귀로다. 15 그는 쉼을 좋게 여기고 땅을 보고 기쁘게 여기며, 그의 어깨를 낮춰 짐을 지고 조공에 종이 되었도다.』(창세기 49:14, 15)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이 젊은이에게는 참으로 대단한 영예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짐꾼이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두 개의 짐이 주워졌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백성에 대한 짐이었지요, 그는 이 짐들을 기꺼이 짊어져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쉼을 얻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희락의 땅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62’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습니다.『너희는 서로의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라.』바로 이것이 잇사칼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타인의 짐을 지고 있는지, 반대로 그들의 짐에 무게를 더할 뿐인지 묻지 않을 수 없군요.

  ‘민수기 2228’에 보면 참으로 복된 나귀가 나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나귀는 신사가 아니라 숙녀였습니다. 그 구절을 읽어보면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나귀(she)가 발라암에게 말하기를...』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귀가 암컷이었는데도 남자의 목소리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말못하는 나귀가 사람(man)의 음성으로 말하여 그 선지자의 미친 짓을 막았느니라.』(베드로후서 216b)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숙녀 나귀를 “말못하는 나귀”라고 칭했을 때 자신이 얘기하는 바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숙녀가 남자의 목소리로 말했다는 사실 또한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도대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그 선지자를 화들짝 놀라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말못하는 나귀가 말을 하는데 그것도 나귀 숙녀의 입에서 사내 목소리가 흘러 나온 것이지요, 이 정도면 그 누구라도 감명 받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나귀는 그 선지자 아래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타고 계시던 나귀는 도중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수나귀였고 즉각적인 순종으로 주님을 여정의 끝까지 내내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일하다가 도중에 주저앉고 마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매여있지 않아 여기 저기 주님을 모셔다 드릴 수는 있지만, 실패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실하기 위해선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발라암이 탔던 나귀는 나귀답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진리를 온화하게 전했으며 한마디도 헛되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대꾸하거나 적당히 구슬리려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그녀의 주인을 흉보는 건 물론이거니와 자기의 운명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적지에 도달하자 정곡을 콕 찌른 후 임무를 끝냈던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참으로 대단한 교훈이 아닙니까! 그들이 숙녀인지 신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다른 것도 아닌 이 나귀가 내뱉은 몇 마디의 말이 기록되어 수세기에 걸쳐 보존될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요.『너희의 말이 항상 은혜와 더불어 있게 하고 소금으로 맛을 내듯 하라. 이는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골로새서 4:6).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자신이 보살펴야 했던 나귀들을 잃어버린 사건은 매우 눈여겨 볼 만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양들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그들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이 두 남자와 그들이 기르던 짐승의 관계는 후에 그들이 다스리기로 되어있던 백성들과의 관계를 그림처럼 보여 줍니다. 나귀와 양, 모두 다 보살핌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곁길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또한 한쪽으로 새기를 좋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정도(正道)보다 샛길이 낫다고 속삭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물통에서 떠 온 것보다는 훔쳐 온 물이 달고 맛있다고들 합니다. 정리하자면, 사울의 소년시절은 잃어버린 죄인의 유형인 나귀를 나타내는 반면, 다윗의 소년시절은 성도의 유형인 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 욥의 시대, 즉 수세기 전에도 역시 나귀는 나귀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의 창조 이래로 지금까지 모양이나 특징이 변화된 동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저는 여태껏 “진화”라는 실없는 가설을 증명하는 어떤 증거를 하나라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름만 그럴듯한 이 이론을 선동하는 자들의 모든 음모와 계획을 송두리째 거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이러한 입장은 종의 변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변함없을 것입니다.
  ‘욥기
114’에 보면『...“소들은 밭을 갈고 나귀들은 그 옆에서 풀을 뜯는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소는 정결한 성도를 예표하는 반면, 나귀는 불결한 죄인을 나타냅니다. 즉 소들은 쉴새없이 주인을 섬기며 그를 위해 가치있는 것을 생산하지만, 나귀들은 주인의 소유와 소들이 내는 산물을 먹어치우는 데만 급급할 뿐입니다.
  죄인과 성도의 경우와 이 얼마나 흡사합니까? 성도는 자신의 주를 위해 일하는 반면, 불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일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유익을 구하지만, 죄인은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을 뿐입니다.
  ‘이사야
13’에『소도 자기의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진리를 예로 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소는 자신을 돌보는 이에게 관심을 주는 반면, 나귀는 주인의 양식을 축낼 뿐입니다. 소는 자신의 주인에게 헌신적이지만, 나귀는 주인의 선물에만 관심을 둡니다. 또한 소는 자신이 섬기는 이와의 친교를 구하지만, 나귀는 꼴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친교 따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말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죄인은 그리스도의 선물을 바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한 예로, 갈보리 언덕 위의 병사들은 구주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주님의 옷을 놓고 도박판을 벌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원했던 건 주님이 아니라, 바로 그분이 가졌던 물건이었던 것이지요, 이 두 부류 중에 당신은 어디에 속하십니까? 자, 여기서 당신이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던 주님의 선물을 모두 소유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과연 당신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까요? 또 큼직한 구유에 여물과 클로버가 가득한 안전한 피난처가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그때 당신은 그것을 주신 분께 관심을 가질까요? 소는 자기 앞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두고 감사를 표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참 좋으신 주님께 감사하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승리에 찬 예루살렘 입성에 쓰시려고 고른 것은 다름 아닌 어린데다가 작기까지한 짐승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도 취하실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어리고 작을 뿐 아니라, 심지어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주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인생의 작은 길을 따라 가면서 주님을 모실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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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터 L. 윌슨 /『 윌슨의 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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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range Short Stories by the Doctor
    by
    Walter L. Wilson,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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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signed to Sword of the Lord Publishers
    Murfreesboro, Tennessee.

    Korean ⓒ 2004 by Pilgrim Books
    Seoul, Korea.

● Walter Lewis Wilsonㆍ1881∼1969
■ 월터 루이스 윌슨
(Walter Lewis Wilson18811969)

  월터 루이스 윌슨 박사는 내과 의사였지만, 뛰어난 “영적인 의사”로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는 대화를 시도하고 주도해 가는 데에 대가였으며, 그의 화술은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아 그들을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로 인도했다.
  윌슨 박사는 젊은 장의사와 함께 묘지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
여보게, 젊은이, 성경에「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마태복음 822)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고 질문을 던졌는가 하면, 또 판사에게는「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를 강조하면서 ‘요한복음 524을 읽어 주기도 했다. 그는 증거할 기회를 얻기 위해 늘 깨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그의 책 속에 있다. 그의 글의 소재는 연필, 펜, 막대기, 우표, 말, 닭, 집, 이발, 콩, 욕조, 나비, 새 등 생활 속의 평범하고 보잘 것 없고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그러한 소재들을 잘 관찰하여 실제적이고 귀한 교훈과 영적인 진리들을 놀랄 만큼 잘 표현하였다.
  그의 글은 모든 세대가 읽어도 좋은 경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린이에게는 실물 교육을 위한 기초를 잘 제공해 주며, 젊은이와 장년에게는 경건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이제 그의 책에 게재된 글을 통해 독자들이 신선한 영적 교훈을 얻기 바란다.

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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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