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루터 (Martin
Lutherㆍ1483∼1546) ━
“ 나에 관해서라면,
난 이미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웜즈에 들어갈 것을 분명히 결심했고, 이는 누구도
뒤집을 수 없소이다. 비록 거기에 나를 대항하는 마귀들이
웜즈의 지붕들을 덮고 있는 기왓장들만큼이나 득실거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그리 결심한 것이오. ”
─ 본문 중에서...
─
【 영어원문
읽기
】 |
이 저명한 독일의
성직자요 교회 개혁자는 ‘존 루터’(John
Luther or Hans
Luther)와 ‘마가렛
지에글러’(Margaret
Ziegler or Margarethe
Lindemann)의
아들로서, 만스펠트(Mansfeld) 주(州)에 소재한 색소니(Saxony)의 한 마을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1483년
11월 10일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생과 신분이 본시 비천하기 그지없는
데다 광부를 업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후에 위엄을 갖춘
고위급 행정관이 된 것을 보면, 그가 가족의 삶을 나아지게 한 것이
자기 일에 쏟아 부은 그의 열의와 근면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루터는
일찍부터 글자를 깨우친지라, 열세 살(13세)이
됐을 때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학교로 보내졌다가 튀링겐(Thuringia)의 아이제나흐(Eisenach)로 옮겨졌는데, 그곳에 4년을 머물면서 과연 그가 머지않은 장래에
탁월한 인물이 될 거라는 증거들을 일찌감치 내비쳤습니다. 1501년에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에
보내져 그곳에서 논리학과 철학의 일반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그는 스무
살이 되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ㆍB.C.
384∼322)의 물리학과 윤리학, 그 밖의
다른 분야의 철학들을 강의했습니다. 그 뒤 그는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변호사 쪽으로 나갈 목적으로 민법으로 마음을 돌렸으나, 우연히 일어난
다음의 사건 때문에 이 일에서도 방향을 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내려친 번개에 맞아
그는 그 자리서 고꾸라진 반면, 옆의 친구는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번 일로 너무도 심한 충격에 시달리던 그는 그 어떤 친구에게도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지 않고서 세상을 등진 채 성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ㆍ354∼430) 수도회의 은둔자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그는 성 어거스틴과 스콜라 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일에 몰두했는데,
장서들을 하나 하나 섭렵하는 가운데 우연히 그가 전에 본 적이 없는
라틴어 성경 사본을 한 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크나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지라, 그는 그것을 몹시도 탐내며 읽고 또 읽었으며,
그 수많은 성경 구절들 중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1년간의 수련(修練) 수사 과정을 거친 후 에르푸르트
수도원(Augustinerkloster or
Augustinian
Monastery, Erfurt)에서
성직자가 될 것을 선서했습니다. 그는 사제 취임식을 하고서 1507년에 처음으로 미사를 직접 거행했습니다.
그 해가 지나자, 그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비텐베르크 대학(University
of Wittenberg)으로
옮겨 갔는데, 이는 이제 막 설립된 이 대학에 루터처럼 위대한 자질과
학식으로 이름 높은 인물이 존재하고 권위를 행사하는 것보다 그것에
즉각적인 명성과 신용을 가져다 줄 만한 것이 없을 거라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에르푸르트 대학에는 어거스틴회 수도원에 속해 있는
연로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같은 수도원에 속해 있어 어거스틴회의
수사였던 루터는 다양한 것들, 특히 죄들의 사함에 대해 그와 함께 의논했는데,
특히 이와 관련해 앞서 말한 그 늙은 신부는 루터에게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려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모든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임을 천명함과
동시에, 이 해석은 성 버나드(St.
Bernardㆍ1090∼1153)에 의해 확증된 것이라고 덧붙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자네의 죄들이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시며 자네의 마음에 주시는
증걸세. 왜냐하면 인간이 믿음에 의해 값없이 의롭게 된다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교리이니 말일세.”
이 말에 루터는 기운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로마서 5:1)라는 말씀을 되풀이해서 말했던 사도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의
주해서를 읽은 그는 이 노인의 이야기는 물론, 자신의 영(靈ㆍspirit)
안에 받아들인 위로로 인해 그가 전에 읽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그러한
해석들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보여 준 예들을 차근차근 읽어가며
조금씩 조금씩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쉬지 않았고 믿음 또한 기도의 힘으로 자극을 받은지라,
그는 그 교리를 아주 명료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에르푸르트에서의 그의 연구를 어거스틴회 수도원에서 4년
동안 지속해 나갔습니다. 1512년,
그가 소속된 수도회의 몇몇 수도원들이 그들의 주교 총대리와 싸움을
벌이자, 루터가 로마로 가서 그들의 대의명분을 주장할 자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간 그는 교황과 그의 궁정을 보았음은 물론이거니와
그곳 성직자들의 관례를 관찰할 기회도 가졌는데, 이 때 그들이 미사를
거행하며 보여준 조급하고 피상적이고 불경건한 모습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해 두었습니다. 그는 여정의 주 용무인 분쟁을 조절하는 일을 마치고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색소니의 선거후(選擧侯: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인 프레데릭의 도움으로 신학 박사에 임명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가 설교하는 것을 자주 들어온 터에 그의 장점을
완벽히 꿰고 있으면서 높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계속 머무르면서 신학 교수로서 자신의 소명에 전념했습니다.
당시 그는 여기서 성경강의 원고들을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그가 자신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정리하고
비교 설명한 로마서와 시편을 이전 주석자들과 어찌나 차이나게 설명하던지,
“길고 칠흑 같던
밤이 지나고 모든 경건하고 신중한 성도들을 판단할 새날이 밝아 오는
듯” 했습니다.
루터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부지런히
돌려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침례인 요한이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증명했듯이, 루터 또한 바로 그렇게 죄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으로 값없이 용서되니 우리가 이 풍성한 선물을 믿음 가득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면서 길고 칠흑 같은 밤이 지난
후의 눈부신 태양처럼 교회를 환하게 밝혀 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은 그의 신앙 고백과 일치했는지라, 그의 말이 단순히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본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이 명백히 내비쳐졌습니다. 그의
거룩한 삶은 그것에 탄복해 마지 않던 그의 청중들의 마음을 적잖이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더 적합한
자질을 갖추기 위해,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주의 깊게 몰두했으며,
바로 이와 같이 그가 헌신되어 있던 1517년에
문제의 그 총체적인 면죄(免罪ㆍindulgence:‘대사’<大赦>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로마카톨릭이
고해 성사 외에 주는, 이미 용서한 죄에 대해 주어지는 현세의 벌에
대한 유한<有限>의 관용을 말한다.)가 공표되었습니다. 1513년 3월에 줄리우스 2세(Pope
Julius II)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Pope
Leo X)는 성
바울 대성당(the
Church of St. Paul)이라는
웅장한 건물을 로마에 짓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 이 일은 줄리우스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끝마치려면 막대한 예산이
여전히 요구되는지라, 레오는 성 바울 대성당 건축에 한 푼이라도 기부하는
자들을 위해 1517년에 전 유럽에 걸친 총체적인
면죄를 발표하였으며, 그는 각 나라마다 사람들을 임명해 이 면죄들에
찬사를 보내고 또 그것들에 대해 돈을 긁어모으도록 했습니다. 이 괴이한
행위들로 인해 비텐베르크 전역에서는 성난 아우성이 메아리쳤고, 특히
루터의 경건한 열성에 불이 붙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는 본시 활기
넘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당 사건에 자제심을 잃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것들에 선전포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만성절(萬聖節ㆍAll Saints’ Day:‘모든 성인의 축일’ 또는 ‘제성첨례ㆍ諸聖瞻禮’라 불리는 이 날은 11월 1일에 천상의 모든 성인과 순교자의
영혼을 제사 지낸다.) 전날 밤, 그러니까 1517년에,
그는 그 도시의 성곽 옆에 붙어 있는 교회의 정문에 면죄에 관한 논문을
공개적으로 박아 놓았으며, 그 글의 서두에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글로든 논쟁으로든 한번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내걸었습니다. 면죄에
관한 루터의 주장들이 공표되자마자, 도미니크회의 수사이자 면죄부
판촉 위원인 테첼(Johann
Tetzelㆍ1465∼1519)이 그것들에 정면으로 걸고 넘어지는
일련의 제안들을 담은 논문을 잘 다듬어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떴으니, 그는 자신의 수도회의 성직자들을 부추겨 루터를 대적케
하고, 아주 괘씸한 이단이라며 그를 설교단으로부터 파문시켰는가 하면,
그의 논문을 프랑크푸르트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웠던 것입니다. 테첼의
논문 또한 비텐베르크의 루터 신봉자들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정작 루터
자신은 그 일에 관여한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1518년, 루터는 비록 친구들의 설득에 그것을 단념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권위에 대한 순종을 보이기 위해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한편 수도원에서는 총회가 열려 4월
26일에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부서(Martin Bucerㆍ1491∼1551)가 받아 적은 후 그것을 비투스
레나누스(Beatus
Rhenanusㆍ1485∼1547)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곁들여
전해 주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그에 대한 대적들의
열성은 날이 갈수록 적극적으로 돌변해 갔고, 마침내 그는 레오 10세에게 이단으로 고소되었습니다. 그는 일이
그렇게 되자 하이델베르크로부터 돌아왔습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유순하기
짝없는 용어들로 써 내려간 편지를 교황에게 부쳤고, 면죄와 관련된
자신의 주장들에 대한 해석 또한 동봉해서 보냈습니다. 이 편지가
쓰인 날짜는 1518년 삼위일체 축일(Trinity
Sunday)이며,
거기엔 그의 항의가 첨가되어 있었는데, 그는 거기서 “자신은 성경과 로마 교회가 받아들이고 준수한
교부들의 교리, 또는 교황들의 교회법령집과 교령집들에 역행하는 그
어떤 의견을 감히 제안하거나 비호하려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는 성 토마스(St.
Thomas Aquinasㆍ1225∼1274), 보나드벤쳐(Bonaventureㆍ1221∼1274), 그 밖의 스콜라 철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어떤 성경에도 근거를 두지 않고 내세우는 지론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천명했습니다. 교황과 마찬가지로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도
색소니에서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루터의 주장들을 틀어막을 일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카톨릭 교회와 황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막시밀리안은 1518년
8월 5일로
날짜가 적힌 의뢰용 서한을 레오에게 보내 그의 권위로 이 쓸모없고,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논쟁들을 금지시켜 달라고 간청했으며, 이와 더불어
로마 교황이 금지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제국에서 엄격히 집행할 것을
그에게 확실히 해 두었습니다. 한편 루터는 현재 로마에서
그에 대해 어떤 일들이 오가는지를 간파하자마자 자신이 그곳에 끌려가는
것을 막고 그의 대의명분에 대한 발언 기회를 독일에서 얻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했습니다. 선거후 또한 루터의 로마행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는 추기경 카제탄(Thomas
Cajetanㆍ1469∼1534)에게 그가 직접 독일의 교황특사가
되어 그 앞에 루터를 데려다 놓고 그의 주장을 들어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습니다.
이 청원에 교황은 그 대의명분이 추기경 카제탄 앞에서 심리를 받는데
동의하고서 그에게 그것을 결정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선거후가 보내는 편지들을 가지고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를 향해 곧바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곳에 1518년 10월에
도착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추기경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종류의 논쟁들보다는 추기경의 권한을 더 염려해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된 루터는 불복종할 경우 체포된다는 두려움에 20일에 아우크스부르크를 빠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떠나기에 앞서 교황에게 올리는 공식 상소를 정식으로 발표했으며,
자신이 선거후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똑같은 교리를 계속해서 가르치며 모든 심문관들에게 한번 와서 자기와
논쟁을 벌여 보는게 어떻겠냐는 도전장을 내던졌습니다. 루터에
관해 교황의 시종 밀티티우스(Miltitius)는
그가 그의 주장을 철회케 하든지, 그를 보호해 주기를 거절하든지 양자
간에 택일할 것을 선거후에게 요구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신용이 참으로 확고히 서 있는 마당에 현 상황이 그리 쉽사리
고압적으로 돌아갈 리 만무했습니다. 게다가 우연찮게 황제 막시밀리안마저
이 달 12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일의 형세를 싹 바꿔 놓아 루터의 운명이 이전보다 더 선거후의 결정에
달려 있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따라서 밀티티우스는 공정하고 신사적인
방법으로 되어질 수 있는 일을 시도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에,
이를 위해 루터와 약간의 상의를 거쳤습니다. 이 모든
교섭들이 오가는 동안, 뻗어 나간 루터의 교리들은 크게 우세를 떨쳤고,
루터 자신에게도 고국과 해외에서 격려가 빗발쳤습니다. 이 때 보헤미안들은
그에게 개혁 작업 도중 순교당한 저 유명한 존 후스(John
Hussㆍ1372∼1415)의 책과 편지들을 보내 주었는데,
그들은 그 편지들을 통해 그가 가르치는 신학이 순수하고 건전한 정통
신학인 것을 자신들도 인정하는 바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뜻을 굽히지
말고 잘 참고 인내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위대한 학자들이 그에게 가세했습니다. 1519년에, 그는 존 에퀴우스(John Eccius)와 라이프치히(Leipsic or
Leipzig)에서 유명한 논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도 결국 여타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양편 모두 의견 차를 조금도
좁히지 못하고 서로 간에 인격에 대한 적대감만 가중시킨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해가 다 지날 무렵, 루터는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그는 거기서 두 가지 형태로 치러지는 영성체를 맞상대로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이 책은 미스니아의 주교(bishop
of Misnia)에
의해 1520년 1월
24일에 정죄되었습니다. 루터가
새 황제와 독일의 주교들에게 해명하려고 애쓰는 사이, 에퀴우스는 탄원하여
그를 정죄키 위해 로마로 갔는데, 이번엔 이 일을 무리없이 달성하리라는
것을 쉽사리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루터의 대적들의 끈덕진 간청을 이기지 못한 레오는 결국
그를 정식으로 정죄한다는 것을 1520년
6월 15일자
교서에 발표했습니다. 이 교서는 독일로 옮겨져 로마에서 그것을 간청한
에퀴우스에 의해 공표되었으며, 그는 교황의 지시에 의해 학식과 달변으로
이름을 날리던 제롬 알렉산더(Jerome Alexander)와 더불어 그것을 집행할 임무를 떠맡게 되었습니다.
한편 스페인의 샤를 5세(Charles
V, Holy Roman Emperor)는
로우 컨트리즈(Low
Countries:북해 연안의 낮은 지대로 지금의
베네룩스<Benelux
=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3국을 말함>의 총칭)의 상황을
바로잡은 후 독일로 갔으며, 그곳 아익스-라-샤뺄(Aix-la-Chapelle or
Aachen)에서 10월
25일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족 목요일(Maunday
Thursday:부활절 전 목요일로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사도들의 발을 씻으신 것을 기념하고, 또 성체와 서품<敍品>의
성사<聖事>를 그리스도께서 정한 것을 기념하는 로마카톨릭의
날)에 교황의 견책을 받고 처음으로 고소를 당한 마틴 루터는 부활절이
지난 후 곧바로 웜즈(Worms)로의 여정에 박차를 가했으며,
그곳에서 황제와 독일의 모든 나라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끊임없이
진리를 고수하고 자신을 방어하며 대적들에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루터는 숙소를 정해 융숭히 대접을 받았으며, 수많은 백작들과
남작들, 수도원 기사들, 신사들, 사제들, 평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그들은 그의 숙소에 밤늦도록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많은 이들, 그러니까 그 밖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의 대적들의 예상을
깨고 웜즈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함께 머리를 싸매고
신중히 검토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철썩같이 믿었던 기존의 약속들이
시작부터 깨진 걸 염두에 두고서 그에게 현재와 같은 위험에 목숨 걸지
말라며 설득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득과 충고를 모두 귀담아
들은 그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나에 관해서라면, 난 이미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웜즈에 들어갈 것을 분명히 결심했고,
이는 누구도 뒤집을 수 없소이다. 비록 거기에 나를 대항하는 마귀들이
웜즈의 지붕들을 덮고 있는 기왓장들만큼이나 득실거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참으로 그리 결심한 것이오.” 다음 날, 왕의 사자가 그를 숙소에서
왕궁으로 데려왔는데, 군주들이 중대한 협의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라
거기서 6시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던 그는 그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후 군주들이 자리에 앉고 루터가 등장하자,
종교 재판소 판사인 에퀴우스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시오.
당신은 당신이 인정한 모든 책들을 그대로 간수하고 있을 테요, 아니면
그 중 어떤 걸 파기하고 순순히 굴복할 테요?” 마틴 루터는 점잖고 겸손하게
답변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뚝심과 그리스도인의 절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제
폐하와 여러 각하들께서 명백한 답변을 원하신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저는 이것을 어떤 의심이나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최대한 단호히 입
벌려 고백하는 바입니다. 제가 만약 성경의 증거들로 납득하지 못한다면(이는
제가 교황도, 수도 없이 잘못을 범하고 스스로에게도 모순을 일으켰던
그의 총공회들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인데), 저의 양심은 이 성경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꽁꽁 묶여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지라, 전 어떤 형태의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럴 가능성도 없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경건하지도 합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사료해 볼 때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관해 저의 입장은 단호하며,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기에 증언을 마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군주들은 루터가 발설한 이 답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부지런히 검토하고 나자, 의장이
다음과 같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에게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단한 답변을 요구하고 계시오. 당신은 당신의 모든 저작들을
기독교적이라고 옹호할 거요, 아니면 그러기를 꺼려할 거요?” 그러자 루터는
황제와 귀족들에게 몸을 돌리면서 말하길, 제발 그의 대적들이 명백한
반증을 내세우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떠밀어서 거룩한
성경으로 확증을 얻고 있는 그의 양심을 거슬러 굴복하게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전 성경으로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웜즈 의회가 해산되기 전, 샤를 5세는 5월
8일자로 한 칙령을 작성토록 하여
다음과 같이 포고했습니다. 향후 마틴 루터는 교황의 판결에 따라 로마카톨릭에서
분리된 회원, 즉 교회 분리론자요 고집불통의 악명 높은 이단으로 간주된다고
말입니다. 샤를 5세에 의해 집행된 레오 10세의 교서가 전 제국에 뇌성처럼 퍼져 나가는
사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안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거 생활에 신물이 난 그는 1522년
3월 6일,
그러니까 열 달 남짓 숨어 지낸 끝에 비텐베르크에 다시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루터는 이제 교황과 주교들을
대적해 노골적으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되도록이면 많이
그들의 권위를 경멸하도록 하기 위해 교황의 교서를 대적하는 책과 “주교들의 위계”(The Order of Bishops)라고 그릇되이 불려지는 그 성직위계에 대항하는
또 다른 책을 각각 한 권씩 집필했습니다. 그는 또한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을
출간했는데, 이것은 후에 그 자신과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ㆍ1497∼1560)에 의해 교열되었습니다.
사태가 독일에서 매우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이탈리아에서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는 교황과 황제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그 사이 로마가 두 번이나 탈취되고 교황이 투옥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주들까지도 서로 간에 물어뜯는 일에 이처럼 동원되어
있는 동안, 루터는 교황주의자들을 대항하면서 개혁 작업을 수행해 나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1527년,
루터는 심장 부위의 혈액이 갑자기 응고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했습니다. 독일의 혼란에 끝이 없는 듯하자, 황제는 성가시게 구는
터키인들을 대항해 제국의 군주들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1529년에 쉬페에르(Spires or
Speyer)에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4개의 도시들, 즉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 뉘른베르크(Nuremberg), 울름(Ulm), 콘스탄스(Constance or
Konstanz), 로이틀링겐(Retlingen), 빈트샤임(Windsheim or
Bad Windsheim), 메밍겐(Memmingen), 린도우(Lindow), 켐텐(Kempten), 하일브론(Hailbron), 이스니(Isny), 바이셈부르크(Weissemburg), 뇌르트링겐(Nortlingen or
Nordlingen), 성 갈(St. Gal)이 의회의 법령에 ‘항의’(protestation)해 손을 잡았고, 이것은 글로 기록되어 1529년 4월에 공표되었습니다. 이것이
독일의 개혁자들에게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라는 이름을 안겨 준 그 유명한
항의였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견고한 연대를 이루기 위해 애를 썼으며, 그들은 색소니 선거후와 그의
동맹 세력들이 의회가 결의한 것을 승인하는 일을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의회의원들은 상소문을 작성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후에 그들의 “신앙 고백”(Confession), 즉 중용을 지키는 멜랑히톤이
또한 해명할 구실로도 작성한 저 유명한 신앙 고백에 대한 해명서를
제출했습니다. 이것들은 여러 군주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루터는 그저
가만히 앉아 그가 마무리지은 강력한 과업을 묵상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한 수도승이 혈혈단신으로 로마 교회에
참으로 갑작스런 충격을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전복시키기
위해 그와 같은 또 한 차례의 충격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두고 볼
때, 그 일이 강력한 과업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1533년,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Augsburg
Confession:1530년에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표한 신조)을
고수한 연유로 고난을 겪은 오스차쯔(Oschatz) 시민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으며,
1534년에는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그로부터 1년
후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이 해에〈미사와 사제들의 화체설에 대한 반론ㆍAgainst Masses and the Consecration of
Priests〉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1537년 2월,
종교 문제를 둘러싼 회합이 스말칼드(Smalkald or
Schmalkalden)에서 열렸는데, 여기에 루터와
멜랑히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한 루터는 몹시
심한 병에 걸려 다시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지는 동안 남긴 유언에서 로마카톨릭에 대한 자신의 증오를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일에 몰두했으며, 이 일은 1546년에 일어났습니다. 그
해에 그는 멜랑히톤을 데리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고국을 방문했다가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그는 만스펠트의 백작들에
의해 그쪽으로 다시 부름을 받았는데, 이유는 그들의 경계선을 두고
일어난 분쟁을 조정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100명 이상 되는 기병대의 영접을 받아 매우 영예롭게
인도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너무도 심히 아파하는지라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는 이 발작적인 병들이 그가 큰
일을 맡을 때면 종종 찾아온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번엔 전과 달리 회복하지
못하고 2월 18일
예순셋(63세)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을 거두기 조금 전에 그는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습니다, “두세 번 열린 적이 있는 트렌트 공회(the
Coucil of Trent)와
교황이 그것에 거슬러 이상한 것들을 고안해 낼 것이기 때문이오.” 오전 9시가
되기 전, 자신이 죽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걸 느낀 그는 다음과 같이
경건한 기도로 스스로를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영원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나이다. 저는 그분을 알았고, 전 그분을 저의
생명과 저의 건강과 저의 구속으로서 사랑했지만, 그 사악한 자는 그분을
박해하고, 욕하고, 상처를 입히며 괴롭혔나이다. 제 혼을 주께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후 그는 세 번 연달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전 저의 영을 주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오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저를 구속해 주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자신의 기도들을 여러 번 되뇌이고서
그는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그의 순결한
영은 그 속세의 몸을 평온히 떠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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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B. 폴부쉬/『 폭스의 순교사ː제9장 』... ───────────────────────────────
(시편 31:5)주의
손에 나의 영을 의탁하나이다. 오 진리의 주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누가복음 23:46)○ 그때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질러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하시고,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숨을 거두시니라.
(사도행전 20:32)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의탁하노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굳게 세워 줄 것이며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너희에게 유업을 줄 것이라.
【 그림 자료 】
① 개혁교회의
간략한 역사.
② 일곱 교회의
메시지와 교회사를 비교.
③ 교회에
관한 도표.
④ 기독교의
실패.
『 FOX’S BOOK OF MARTYRS 』
by William Byron Forbush
first published
1926 copyright ⓒ 2002/Korean by 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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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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