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갖은 회유와
강압 등 악랄한 수단으로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케 함으로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게
된다. 당국은 먼저 장로교의 유력한 지도자 몇 사람을 선발하여 일본에
보내어 신사참배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갖고 돌아와서 한국교회를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 1938년 5월24일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목사 등을 일본으로
데려가서 일본교회들을 돌아보게 하는 등 방백으로 회유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저들로 하여금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정부는 장로교단 제27회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 가결안을 상정하도록 철저한 준비를 갖추었다.
총회가 개최되기 전에 벌써 주기철 목사를 위시하여 이기선, 김선두
등 반대하는 교역자들을 미리 구금하였다.(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저항하여 순교하였다.)경찰의
압력으로 총회 장소가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옮겨졌다. 총회 개최 전날
평양 경찰서는 평양, 평서, 안주 등 3노회
대표를 불러 평양노회장 박응률이 제안을, 평서노회장 박임현은 동의를,
안주노회 총대 길인섭은 재청을 하도록 된 통과 각본을 시달했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한국교회로는 수치스런 신사참배 가결의 서막을
올리는 장로회 27회 총회가 일경의 감시 속에 개최되었다.
그 당시 총회장소인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 명의 사복 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당 전면에는 고위 경찰관 수십 명이 긴 칼을 차고 앉아
있었고 회의는 이미 조작한 각본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들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침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이 회의의
부당성을 주장하려 했으나 경찰이 제지시키자 선교사 전원이 일어나
불법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거센 반항자들에게는 일경들의 폭력이 기다려질
뿐이었다. 첫 날은 임원개선으로 회장 홍택기, 부회장 김길창, 서기
관진근, 부서기 조택수, 회록서기 권택희, 회록 부서기 전재호, 회계
고한규, 부회계 이춘섭이 뽑혔다.
그 다음 날인 10일 평남지사와 경찰서장의 참석
아래 총회가 속개되었다. 공천부장 함태영의 보고가 있었다.
“평양,
평서, 안주 3노회의 연합 대표 박응률 씨의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건은 채용여부를 상정하였습니다.”
회장 홍영택 목사는 보고를 받자 총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可)하면
예하시오.”
총대(總代:각 교회를 대표해서 총회에 참석한 목사, 장로들)들은 모두 “예”라고 답했다. 홍영택 목사는 부(否)도
묻지 않은 채 각본대로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 후 심의현 목사가 신사참배를
즉시 실행하자고 특별 청원을 하였다. 김길창 목사의 인솔로 총대들이
일렬로 줄을 지어 걸어갔고, 마침내 허리 굽혀 신사참배를 하였다. 일제의
강압의 의한 것이었지만 권력 앞에 신앙의 지조를 판 씻을 수 없는 배교의
날이었다.
그 후, 1907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은 영적인 황무지가 되었고
인간을 우상으로 섬기는 저주의 땅이 되어 버렸다.
─────────────────────── ( 2001┃3/4┃토기장이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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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현명한 자들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 무궁토록 빛나리라. 13:43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처럼 빛나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다니엘 12:3┃마태복음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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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차를 돌리는 손길
]
『 평양, 1938년 3월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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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belie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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