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1. 01:11

“ 전도서 ─ 세상적인 삶의 무가치함을 보여 주는 책 ” (양육/성장)

(양육/성장) [20201228] ● 전도서 ─ 세상적인 삶의 무가치함을 보여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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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Ecclesiastes

─ 세상적인 삶의 무가치함을 보여 주는 책 ─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시편 12:6)┃

●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한 삶이란 다른아닌, 세상적인 삶을 말한다. 신약적 관점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말하며, 구약적 관점으로 말한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이 인생을 최대한 잘 누리고 가장 깊은 철학적 가치를 발견한다 해도 그것이 “헛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조로 전도서를 대할 때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 자신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모든 인생의 낙을 누려 본 후에 인생의 가치를 이와 같이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이 세상 삶에 대한 결론이다.

 (KJV 1611 ─「전도서 1장」)

  어떤 설교자는 전도서의 내용을 구약적인 상황으로 간주하고, 구약은 신약의 진리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허무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들이 가치있게 변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십자가 이전까지의 구약의 상황은 이렇듯 허무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 구약에는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았기에 온전한 구속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에서 ‘가치있는 삶’을 산 성도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의롭고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구약적 상황이라고 해서 모두가 허무한 것은 아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한 삶이란 다른아닌, 세상적인 삶을 말한다. 신약적 관점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말하며, 구약적 관점으로 말한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이 인생을 최대한 잘 누리고 가장 깊은 철학적 가치를 발견한다 해도 그것이
“헛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조로 전도서를 대할 때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 자신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모든 인생의 낙을 누려 본 후에 인생의 가치를 이와 같이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이 세상 삶에 대한 결론이다.

  전도서Ecclesiastes잠언Proverbs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솔로몬이 기록한 책이며, 잠언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지혜로 가득 찬 책이다. 인생들은 잠언과 더불어 전도서를 통해 많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저작 시기에 대해서 말할 때, 잠언은 솔로몬의 지혜가 가장 풍성했을 때인 중반기에 썼고, 전도서는 그가 인생의 모든 경험을 다 한 후인 말년에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그가 경험했던 모든 부와 명예와 쾌락과 철학들이 가장 진하고도 진솔하게 묻어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도서에 대해서는
“허무의 책”이라는 인식을 갖곤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 책에서 “헛되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39번). 먹는 것도, 즐기는 것도, 명성을 누리는 것도, 지혜롭게 행하는 것도, 수고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 책은, 그래서 허무주의 철학을 느끼게까지 하는 책이다.2 전도자가 말하노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그의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갖겠는가?』(전도서 12:2, 3)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헛되다면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곧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의욕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4 ○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나 땅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 5 또한 해도 뜨고 지며 그 떴던 자리로 급히 돌아가는도다.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계속해서 돌며 불다가 그 순환을 따라 다시 돌아가는도다』(전도서 1:46). 그야말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인생이 덧없음을 뜻함)을 말하는 것 아닌가?
  어떤 설교자는 전도서의 내용을 구약적인 상황으로 간주하고, 구약은 신약의 진리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허무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들이 가치있게 변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십자가 이전까지의 구약의 상황은 이렇듯 허무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바로 구약에는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았기에 온전한 구속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약에서
‘가치있는 삶’을 산 성도들을 많이 본다. 그들은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의롭고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 구약적 상황이라고 해서 모두가 허무한 것은 아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는 허무한 삶이란 다름 아닌, 세상적인 삶을 말한다. 신약적 관점으로 말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말하며, 구약적 관점으로 말한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이 인생을 최대한 잘 누리고 가장 깊은 철학적 가치를 발견한다 해도 그것이
“헛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관조로 전도서를 대할 때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솔로몬 자신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모든 인생의 낙을 누려 본 후에 인생의 가치를 이와 같이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하는 이 세상 삶에 대한 결론이다. 만약 하나님을 떠난 누군가가 인생의 가치를 행복이나 사랑 등으로 규정 짓고 있다면 그는 명백하게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을 이처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말한 바,『그것들[우주]은 멸망할 터이나 주께서는 영존하시오니 그것들[우주]은 모두 겉옷처럼 낡아지리이다.』(히브리서 1:11)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한일서 216), 성별하라(로마서 121, 2),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라(골로새서 32)는 등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헛된 것들”

  그러면, 전도서의 저자가 “헛되다”고 말하는 이 세상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말하는가?

  1. 인간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반대해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되다.『내가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의 고통이라』(1:14). 이어지는 15절을 보면『구부러진 것을 반듯하게 할 수 없고 부족한 것은 셀 수도 없도다.』라고 말한다. 즉 인간들은 정해진 것들을 반대해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관장하시는 섭리를 대항해서 “정복”하려는 인간의 모든 욕망들은 헛된 것이다. 부와 욕망은 끝이 없다(510). 하나를 정복하고 성취했다 싶으면 또 다른 수고가 기다리고 있다. 또 하나를 성취한다 해도 인간의 욕망은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가 뭔가를 발명하여『보라, 새 것이라!』(110)고 했다 해도, 그것이 과연 완전히 새 것일 수 있을까? 인간들은 더 새로운 무언인가를 향해 끝없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수고”로 일관한다. 이러한 세상 일에 대해서 성경은 “헛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헛된 일들을 하는 수고가 얼마나 심한지, 전도자는 이것을영의 고통』(전도서 117)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굳이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수고가 아니라 일반적인 수고라 할지라도 헛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의 수고의 대가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취해가기 때문이다. 현명한 제왕이 이루어 놓은 업적은 어리석은 아들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열심히 닦아 놓은 사업의 결과는 일순간의 사기로 빼앗기게 된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약화나 경영 능력의 부족으로 자기의 업적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62). 한 사람의 업적이 그에게 고스란히 돌아가는 예가 얼마나 되는가?(218, 22),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수고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성도들의 의의 수고는 하늘에서 보상받을 것이며, 영원히 주님과 성도들 앞에서 기억될 것이다.

  2. 쾌락과 부귀영화가 헛된 것이다.『○ 내가 내 마음에 말하기를 “이제 가라. 내가 너를 환락으로 시험하리라. 그러므로 쾌락을 즐기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2:1). 솔로몬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귀를 누린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이 다져 놓은 왕국의 안정된 상태 속에서 가장 위대한 번영을 누렸었다. 전쟁이 없었으니 잔치와 공사만이 있기 마련, 그는 자신을 술 가운데로 내어 주었고, 많은 공사들을 통해 자신의 위엄을 더 크게 알렸다. 화려한 정원들이 가꾸어졌고, 찬란한 보화들이 그 앞에 있었다(2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이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부귀영화와 아름답게 꾸민 모든 것들을 황폐케 만들어 버리신다. 고대 바빌론의 그 화려함이 어떻게 사라져갔는가? 로마제국의 위대함은 어떻게 멸망해갔는가? 대영제국의 지지 않던 해는 어떻게 무너지고 말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부귀영화의 끝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3. 자연인들이 아무리 현명해 봤자 그것도 헛된 것이다.『현명한 사람의 눈은 그의 머릿속에 있고 어리석은 자는 어두움 속에 다니거니와, 이들 모두에게 한 가지 일이 일어남을 또한 내 자신이 깨달았도다』(2:14).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다(216). 어떠한 현자라 해도 그의 죽음은 어리석은 자와 다르지 않다. 죽는 방법이 다르고, 죽는 모습이 다르고, 죽는 환경과 위치와 장례행렬의 모습이 다를 수 있지만, 죽는다는 것 자체는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아무리 현명하게 산들 무엇하겠는가? 그도 역시 죽으면 끝이다. 사람에 따라서 죽은 후에 이름을 기억해 주는 정도가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이름의 평가는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는 대대로 기억해 줄 것 같았지만, 다음 세대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서 비판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그 이름이 잊혀지고 만다(216). 잠언에서 솔로몬은 그렇게도 지혜를 강조했다. 그런데 왜 전도서에서는 그것을 무의미하게 말하는가? 그것은 이 지혜가 이 세상에 속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모두 한 죽음으로 죽는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은 결코 그들의 죽음과 같지 않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보다는 못한 것이다. 성도들의 죽음은 결코 그들의 죽음과 같지 않다. 성도들은 비록 짐승들에게 찢기고, 칼날에 쓰러지고, 화형장의 재가 될지라도 황제들의 죽음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성도들(구약성도나 신약성도 모두)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현자들의 죽음은 심지어 짐승들의 죽음과 매한가지로 취급되기까지 한다(319).

  4. 어리석은 왕의 치리는 헛되다(413).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르호보암에게 적용되었다. 그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리석게 왕국을 치리하다가 왕국의 대부분을 여로보함에게 빼앗겼다.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헛된 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헛된 통치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멸망이다(시편 2편).

  5.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헛되다(636). 부자의 잠보다 노동자의 잠이 더 달기 마련이지만(512), 그가 노동의 노예가 되어 평생 수고로 일관하며 시시때때로 낙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또한 헛된 것이다. 그러한 상태로 천 년의 두 배를 산다 해도 그것은 헛된 것이다(66).

  6. 선과 악을 뒤바꾸는 것은 헛된 것이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것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에 따라 당하는 의인들도 있고 또 의인의 행위에 따라 당하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말하노니 이것도 헛되도다』(8:14). 의인들이 악인 취급을 받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마법사, 혹은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박해를 당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서 받을 것이다. 반면 악인들이 의인 취급을 받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들의 악은 곧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드러났을 때 그들의 수치는 크다. 의로운 행위는 결코 흉내낼 수 없다. 그것은 영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여야 한다. 믿음과 의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다. 그것을 흉내내려 한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다.

  7.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은 헛된 것이다.『그러나 사람이 여러 해를 살고 그 모든 것들을 즐거워한다면, 그에게 어두움의 날들을 기억케 하라. 이는 그 날들이 많을 것임이라. 장래 일은 모두가 헛되니라』(11:8). 삶을 즐기는 사람이 미래의 어두운 날들을 기억한다면, 현재의 즐거움도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연인에게 있어서 인생은 즐거움보다는 어두움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가장 커다란 어두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인들은 자기들의 계획으로, 자기들의 종교 행위로 불확실한 미래에다 소망을 둔다. 이것보다 헛된 일은 없다. 미래는 결코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렇다면 전도서는 이처럼 헛된 세상에게 계속 헛된 곳으로 가게 놔 두는 것인가? 물론 이 세상은 계속 헛되이 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전도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이상, 분명히 그 헛된 세상에게 선지자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책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전도자”(preacher 11, 2, 12727128, 9, 10)로 제시하고 있는데, 전도자는 곧 “설교자”를 말한다.킹제임스성경“전도서”(Ecclesiates)라는 말 자체도 “에클레시아”(Ecclesia)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설교자가 회중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 책이다. 즉 전도서는 이 허무한 세상에 무엇인가를 설교해서 그 헛된 것들로부터 돌이키라고 선포하는 책인 것이다.
  그러면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이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 어떻게 돌이키라고 말하는 것인가?
  먼저, 그는 이 헛된 수고 가운데서 안식과 낙을 누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자기 혼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도다. 내가 이것도 보니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2:24). 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솔로몬은 여러 곳에서 수고 가운데 낙을 누리며 쉬라고 말한다(6381599).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적 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원리로서, 수고 가운데 행해지는 일반적인 원리로서, 수고 가운데 쉬지도 않으면 헛된 삶만 살아간다는 말일 뿐이다. 죽은 다음에는 즐거워할 일이 없으니 지금 할 수 있을 때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라는(99), 역시 거듭나지 못한 이 세상의 원리 가운데 있는 말일 뿐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 가운데서 “그나마 나은 것”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온전한 진리는 아니다.
  전도자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진리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너는 이제 너의 젋은 날, 곧 재앙의 날이 이르지 않고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할 해가 가까워 오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 신약적인 관점으로 말한다면, 이 헛된 세상의 수고의 짐들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라는 것이고,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서 구주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아 영적 안식을 누리며, 하늘의 것들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들에 투자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구약으로서, 여기서 하나님은 구주”(Saviour)가 아니라 창조주”(Creator)로 제시된다. 만약 신약적 관점으로 말할 때 그분을 창조주로만 대한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한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주”“구주”가 되셔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굴레를 넘어서 온 세상의 주관자를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주관자이기도 하시다. 그분이 창조주라는 것은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창조주 외에는 전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창조주,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기억하는 것은 구약에서 최상의 모습이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분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목자라는 말이다.(“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말 자체가 “양육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분을 창조주로 기억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헛된 원리들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가 죽을 때, 즉 “애곡하는 사람들이 거리들을 이리저리 다니”고, “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지고 바가지가 우물에서 깨지고 수레바퀴가 저수지에서 깨지”게 될 때(126, 7), 그는 참으로 슬피 울며 음부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라.”(910b)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갈 음부란 바로 지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과(
83)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라는 것(1213), 즉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하라는 것으로, 이것은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비록 구약의 구원과 신약의 구원은 다르지만, 구약에는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붙어있을 수 있다. 이것이 의인이 행할 길이며, 그때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신약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구원에 대해서는 구약과 차이를 보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보호하신다는 영적 원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이 “전도자Preacher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은 모두 헛되고 부정적이라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라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만을 신뢰함으로써 가치 있는 인생을 살며, 그분 안에서 영원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No.124/2002-7) ...

전도서 ─ 세상적인 삶의 무가치함을 보여 주는 책

by
구약의 맥 (No.16)

Copyright ⓒ 2002 Korean by 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
Printed in Korea.

(데살로니가후서 3:118)

1 ○ 끝으로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의 말씀이 너희와 함께 있는 것처럼 속히 전파되어 영광스럽게 되고 2 또 우리가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로부터 구출되게 하옵소서 하라. 이는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3 그러나 께서는 신실하시어 너희를 견고케 하시고, 악으로부터 지키시리라. 4 이제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안에서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들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하리라는 것이라. 5께서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내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바라노라. 6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무질서하게 행동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라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를 멀리하라. 7 너희가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인지를 너희 스스로가 아나니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였으며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먹지 않고, 도리어 주야로 수고하고 애써 일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했노라. 9 이는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요 다만 우리가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노라. 11 우리가 들으니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여 전혀 일하지 아니하고 참견 잘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자들에게 명하고 권하노니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13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구든지 이 편지에 쓴 우리의 말에 순종치 않거든 그를 주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같이 여기지 말고 형제로서 권고하라. 16 ○ 화평의 께서 친히 너희에게 항상 모든 일에 화평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께서 너희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바라노라. 17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라. 이는 편지마다 표가 되므로 이렇게 쓰노라.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2:10)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

(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여기저기 달려서 이제 보고 알며, 거기 넓은 곳에서 찾으라. 만일 너희가 한 사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그 성읍을 용서하리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치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내 양들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Follow me.

romans8_19

(로마서 8:19
피조물이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Bible believers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Divide)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 』(디모데후서 2:15)